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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도시와 건축 요약

甘冥堂 2020. 11. 9. 15:29

2020-1 세계의 도시와 건축 교제 요약

 

1장 서울, 중세도시에서 근대도시로

 

한양 奠都(나라의 도읍을 정함)

1392易姓革命-이성계-주자학적 명분. 지리도참설-무엇보다 한강의 존재

유교 도시조영 원칙-周禮 冬官 고공기의 원칙-前朝後市. 左廟右社.

새 도성은- 內四山- 백악. 인왕. 낙타. 목멱- 백악을 주산으로 北座南向

1405년 태종5년 한양으로 재천도.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축조- 정도전의 신권과 태종의 군권이 대립 표현

 

조선후기

임진왜란으로 파괴. 경복궁을 재건하기보다 경덕궁(경희궁)을 지었다-讖說

17~18세기 도성인구 두 배 이상이 서울에 거주-20만 명 정도.

서울의 주거 공간- 五村. 兩臺. 字內. 五江으로 구분됨.

 

대한제국기의 도시개조

갑오개혁이후- 국가권력에 의한 도로 개수사업이 본격 시행.

1987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 새로운 도로가 개착되기 시작.

1898. 전차. 1902 서북철도(마포)

경운궁 옆 경희궁을 수리하여 궁궐처럼 사용

都城三大市-남대문 밖 칠패. 동대문 안 이현(광장시장). 경강포구가 새로운 상업거점으로.

 

일제초기 경성 도시 개조사업

격자형 도로망 구성. 광화문 남대문 용산을 잇는 도로가 서울의 기축도로가 됨

성벽철거. 경희궁 토지 건물 총독부 소유로. 창경궁 대부분 철거하고 동식물원 시설.

1916.경복궁 근정전 정면에 조선총독부 신축.

일제는 대한제국 도시 개조를 일본인 중심의 차별적 도시. 진압의 효율성을 강조한 억압적

도시로 개조했다.

 

 

2강 서울 근대 도시건축의 전개와 변화

근대건축이란- 19세기말 유럽에서 시작된 아르누고. 데스틸. 바우하우스 등

근대건축운동 이후의 건축물을 지칭한다.

 

 

 

 

3강 후기 조선시대의 도시계획, 화성

읍성은 사람들이 사는 읍치의 외곽에 성벽을 둘러쌓은 것을 말한다.

해미읍성은 읍치시설만 읍성 내에 있고 백성들은 성벽 밖에 사는 경우

낙안읍성은 수령 백성이 모두 읍성 내에 거주

 

유성룡-읍성에 치성과 옹성을 쌓고 현안 설치.

유형원-읍성을 강화해야. 전국적인 경제발전과 더불어 현실화되었다.

황주. 전주. 대구.동래. 해주. 청주읍성. 이러다가 18세기 말에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 화성이다.

 

1)헌륭원의 조성과 구읍치의 이전

정조가 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천장.

2)신읍치의 도시구조- 팔달산을 배경으로 동향에 배치

3)정조경제정책과 신읍치의 번성

4)문화정책과 화성공역의 계획

정약용-기중기 유형거(수레) 고안. 박제가-벽돌 사용. 조심태-武將으로 현장감독-석재 채취

5)화성공역의 특징-화성은 석성이지만 포루나 공심돈 같은 방어시설은 벽돌로 쌓았다.

모든 일꾼들에게 품 삵을 주었다. 재료값 지불 방식.

 

3.화성의 건축물

성벽. 사대문. 暗門. 水門. 將臺. 弩臺(성 밖의 동향을 살펴 신호나 쇠뇌를 날린다).

空心墩(높은 돈대를 올라가는 어려움을 개선). 角樓(성곽 높은 구릉에).

雉城(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적을 방어).

敵臺(성문과 옹성을 보호하는 시설로 성문 좌우에 설치. 기능은 와 같다.

砲樓(성벽의 일부를 외부에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배치하고

3층의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를 감추어 두었다).

鋪樓(위에 지은 집을 라고 하는데 군사들을 적군이 볼 수 없도록 한 성채의 하나)

烽墩( 봉화대. 성 동쪽에). 中鋪舍(성 밖 비밀 통로)

 

4.화성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화성성역의궤.

1)조선시대 국가행사 보고서 儀軌. 2)화성성역위궤를 통한 화성의 복원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5.화성건설과정과 근대적 모습

 

성곽사적 의미 1.신도시와 경제적 부흥정책은 백성을 위식한 근대적에서 비롯.

2.도로노선에 맞추어 도시의 좌향을 결정하여 전통을 깼다.

3.전통을 따르면서도 공심돈. 포루. 노대들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4.중국의 도성 형태에 따라 북쪽은 지형의 굴곡에 따라. 평지는 읍성을 쌓아 도시를 수용했다.

5.돌과 벽돌을 번갈아 사용하여 건축기술을 업그레이드 했다.

 

4강 도쿄의 역사와 문화

 

도쿄 지형: 서쪽 해발 200m 간도 산지로 서쪽은 높고, 동쪽은 저지대

큰 강은 없고 스미다가와 -휴식과 오락장소.

도쿄와 동아시아와의 다른 점

1.베이징은 12세기 여진족이. 서울 14세기말 조선왕조. 에도(도쿄의 옛이름)17세기

2.베이징. 서울은 유교적 이념. 산을 등지고 남면/ 에도는 남면,유교,풍수지리와 관계없다.

3.베이징. 서울은 유교지식인. 에도는 군인계급 사무라이가 지배

4.베이징 서울은 전국에 지방관 파견. 일본은 전국270개 한()이 분립.

반란방지를 위해 다이묘 처자를 에도에 머물게 했다.

5.왕조의 수도로 항구도시는 거의 없는데. 일본 에도는 항구도시다. 군사. 교통의 중시.

이는 서양세력을 대비하는데 박차를 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됨.

 

1.전근대 세계 최대도시. 에도

(1)에도의 탄생 : 17c 도쿠가와이에야스가 도쿠가와바쿠후(막부 [幕府]) 를 세웠고,

메이지유신 정권도 에도의 이름을 도쿄로 바꿔 수도로 삼았다. 에도는 강의 입구라는 뜻.

조선침략에서 패한 후 히데요시 아들 히데요리 측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이 1600년 세키가하리 전투.

이에야스가 최고직인 쇼군이 되고 에도에 바쿠후를 설치하여 수도를 거듭나게 되었다.

 

(2)에도의 성장과 구조 : 에도의 서쪽 높은 평원 臺地, 사무라이 거주지. 야마노테().

동남쪽 저지대는 조닌(町人:상인). 시타마치(下町)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 지방의 영주 세력. 즉 한()세력을 통제하여 반란 방지를 위해

다이묘들을 일정기간 에도에 머무르게 했고 그 부인과 후계자인 아들은 영원히 에도에 머물게 했다.

이 제도는 에도를 사무라이 도시로 만들었고 인구의 50%를 차지했다.

-가미가타(上方)-전통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 역

-수준 높은 기술. 경험 상업의 노하우로 일본경제를 주름잡았다.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

-에도는 구다라나이모노くだらなぃもの=저질품의 대명사.(쓸모없다. 재미없다의 뜻)

-지마와리(地回) 경제-에도 주변의 상품을 오사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에도로 수입하는 유통시스템

 

2.도쿄의 탄생과 성장

(1)에도에서 도쿄로

페리 來航 - 1853. 여름 미국 태평양함대 에도만 진입-대포를 쏘아

1855. 대지진

1868년 마침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바쿠후는 폐지되었다. 천황제

에도 시민들은 천황을 쇼토쿠 太子의 재림 정도로 이해하고, 간사이 지방의 으로 생각.

 

(2)제국의 수도, 도쿄-1868년 에도를 도쿄로 한다는 조서 발표.

메이지 신정부-에도로 천도한 이유

1.제국의 수도는 제국의 중앙에 있어야 한다.

2.서양식 大艦의 시대이므로 水運의 장래성에서 에도가 유리하다.

3.도로, 공공시설이 많은 에도. 다이묘의 藩邸들을 이용할 수 있다.

4.오사카는 수도가 아니더라도 상업도시로 발전. 에도는 동쪽의 한적한 도시로 몰락할 것이다

 

메이지 정부: 서양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가스등. 전등. 관청 등이 서양풍으로. 철도.

1923.9.1. 도쿄 대지진. 조선인 학살.

도쿄의 인구: 1920년 도쿄시. 217, 인접5118/ 1930.도쿄시 500만명.

뉴욕에 이어 두 번째. 면적은 세계 5.

 

 

 

5. 동방의 뉴욕, 상하이

1.상하이의 매력

혼혈성과 역동성. 와이탄(外灘)이 역동성을 상실하고, 푸동(浦東)이 욱일승천하는 상하이의 미래를 상징

상하이 유형. 발전의 전형. 모순의 공간. 華洋雜居. 五方雜處. 문화의 다원성. 상업문화와 시민문화의 중심지.

문화융합의 거점. 근대문화의 발상지. 전파의 거점.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임과 동시에 근대화의 거점.

건국초기에는 계획경제의 선봉장. 문화대혁명의 시작점. 1980년대 등소평의 개혁개방.

중국최대의 경제중심지. 홍콩을 능가하는 서태평양지역의 국제물류, 국제 금융도시.

 

2.동방의 아름다운 진주(東方明珠)의 등장

, (강이름 호)라고 불려. 19세기 초 도광 연간에 河運에서 海運으로 전환하는 정책으로 비약적 발전.

1843년 개항. 1845년 영국조계의 설치로 획기적 발전. 동부연해지역 전체를 연결하는 지점.

 

3.동방의 뉴욕

와이탄. 난징로 상하이의 상징이면서 조계가 만들어낸 자본주의 상업문화의 산물.

租借地, 租界: 중국의 영토지만 실질적으로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

영국.미국 조계와 프랑스 조계. 그리고 중국정부가 통치하는 華界로 정립되고,

1943년 두 조계가 중국에 반환될 때 까지 지속

상하이가 공업도시로 변모하는 결정적 계기는 1896년 시모노세키 조약.

20세기 초. 세계물류체계 속에 핵심적인 항구로 확정. 1936년 전 중국 교역량의 55.5%

28개 은행 중 22개 은행본점. 전국은행업무의 3/4 담당.

 

4.조계와 화계

(1)상하이의 인구와 이주민

대외무역의 중심이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옮겨왔다.

조계가 인구유입을 주도하다가 1920말 화계가 인구유입을 주도.

화계-인구가 가장 조밀. 프랑스 조계: 고급주택지. 석고문양식의 건물이 즐비. 상하이 지역.

 

(2)조계와 화계

조계는 중국속의 다른 나라 國中之國. 입법 사법 행정의 분리된 체제. 최고책임자는 總董.

도심의 중심.

화계: 구현성 및 외곽지역을 포괄한다. 이들은 서로 분리되어 전차선로 규격도 달랐다.

 

(3)상하이의 공간배치 특징.

자형 구조. 황푸 강 서안을 종축으로. 바이두 교에서 서장로 북단에 이르는 쑤저우주변과/

와이탄에서 경마장까지의 난징로 지역을 두 개의 횡축으로 하는 배치.

상하이 최대의 공업지역- 황푸강 서안지대.

언론사는 山東路 양측 - 앙핑가(望平街)

서점이 운집한 문화의 거리. 다관과 기생집 번성-푸저우(福州) .

프랑스 조계-고급주택 밀집지역-샤페이(霞飛路) 주변.

 

상하이 계획-신도심과 신항만 건설을 축으로 1930년대 국민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되었으나

항일전쟁으로 중단.

 

5.아라(阿拉) 상해인

자신의 출신지-籍貫을 매우 중시한다.

상하이에 산다는 것에 묘한 자부심을 갖는다.

海派 문화- 권위와 집단 보다는 자유와 개인을. 권력보다 부의 축적을. 차보다 커피를.

전통연극보다 재즈나 영화를. 네온사인의 화려한 조명. 이러한 도시 분위기를 말한다.

이질적인 문화의 소지자들을 아라(우리) 상하이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했다.

이 점에서 상하이 인은 지역관념에 근거한 籍貫이라기보다 문화 사회학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적관은 동향인 결속과 우의를 다지고 타 지역사람들과 구별하게 하는 핵심적 요소.

타지역에서 유입하는 이주민을 흡수하는 주요한 메커니즘. 사회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발휘.

근대적 조직으로 등장한 각종 法團. 특히 同業公會. 商會는 동향관계 중심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

닝보인. 광동인. 쑤난인은 양호한 사회적 지위. 쑤베이인 안후이인 등은 상대적으로 하층민.

하층민 노동자 사회에서는 동향관계는 幇口. 互助會. 關帝會. 兄弟會 . 방구는 노동시장과 관련.

 

6.상하이인의 고뇌

학문과 지식-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

末利를 무시하던 인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러한 활동을 드러내놓고 동경.

환락산업,배금주의 맹위. 10만이 넘는 마피아조직인 청방. 흑사회 조직이 지속적으로 발전.

돈과 행복. 돈과 품격. 돈과 모던이 자연스럽게 교환되는 풍토-상하이의 매력.

담론과 적나라한 여체의 상업화가 도시를 휩쓸고, 신여성은 새로운 상하이 문화의 표상.

아름답고 관능적. 오락공간 출입은 더 이상 경계의 대상이 아님. 세련과 돈을 교환할 수 있어야 하며,

독신주의는 모던과 개인의 자유를 동시에 향유하게 하는 돌파구였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모던의 구호. 영화관은 근대를 만끽할 수 있는 오락과 사교의 공간이다.

 

 

 

6장 델리. 역사성과 식민성이 만나는 곳

 

1.지정학적 위치

델리 서쪽 아라왈리 산맥과 타르 사막의 건조지대/ 북쪽 히말라야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이 있어

차가운 북풍을 차단하고/ 서쪽 사막으로부터 뜨거운 바람이 불어

기후는 1년의 대부분 온도가 높고 겨울에는 춥지 않다. 7~8월 몬순기간 /

동쪽 야무나 강과 갠지스 강 사이에 인도 대평원이 있어 델리는 전체적으로 툭 터진 형상이다.

델리가 인도아대륙의 서부 지역과 동부지역을 이어주는 연결통로로

유라시아대륙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인 서북부의 관문지점에 위치해 있다.

 

2.정착의 시작

4,000년전 하랍빠 문화/ 본격적으로 1000년전 아리아인에 의해/

BC6세기 갠지스 강 중류 마가다에서 제국이 건설된 후/ 이후 델리지역은 역사시대의 정주지로 자리 잡는다.

 

3.도시로서의 출발

10c. 또마라족의 군주인 수라즈 빨이 델리 서북쪽 외곽에 수라즈꾼도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또마라 왕국시절 현재의 델리라는 이름은 원형인 딜리까->딜리->영국식민 시기 이후 델리로.

본격적 도시번창은 1192. 무술림 술탄인 꾸뜹 웃딘 아이바가 슐탄의 수도로 이곳에

정착하면서 부터다. 꾸뜹 미나르 첨탑-전형적인 중세도시의 형태를 띠었다.

 

4.중세도시의 발전

델리 술탄이후 아프칸 출신 바바르가 1526에 세운 무갈 제국. 제국의 수도는 아그라였다.

4대황제인 사 자한이 1638년 사자하나바드(사 자한의 도시)를 델리에 건설함으로써 새 면모.

올드 델리인 사자하나바드의 궁성 릴낄라-심미적으로 설계.

제일 큰 시장 짠드나 쪼끄. 그 안에 거대한 모스크 지마 마스지드-사 자한의 최후의 걸작

도시 전체가 이슬람 문화는 아니고 그 내부에는 여전히 힌두가 다수였다.

무갈 제국이 흥성한 16~18c까지 북부인도에서 최고의 전성기였다.

아무나 강과 갠지스 강 사이의 인도대평원에 델리가 속해.

델리는 중심 행정도시로 전통적인 산스끄리뜨 학문과 새로 들어온 이슬람 학문을 접목시켜

제국 전역에 大傳統을 보급.

18c에 들어오면서 위축되기 시작.

18c말 무갈제국의 쇠퇴와 군웅할거 속에서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영국이 최후의 승자로 등장하면서

델리는 다시 도시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5.근대와의 만남

델리대학 영국인이 중간층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대학.

인쇄기술. 서양의 많은 기술과 사상이 널리 보급/ 새로운 학문과 사고는 우르두 문학으로 꽃피었고,

수학 의학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델리 르네상스가 1857년 인도대봉기 전까지 이어짐.

인도 대봉기-영국의 일방적 근대화외 식민지배에 대한 항거. 근대. 가독교 유럽문화/

무갈 복고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1858. 10. 무갈황제와 가족을 모두 버마의 랑군으로 유배시켰고 무갈제국을 종식시킴.

결국 수도를 꼴까따로 옮겼다.

인도 대봉기 이후 기독교인들의 공격. 대기근으로 인구의 1/4이 굶어죽은 가 전체의 1/4.

힌두복고주의 운동은 곧 반근대화 반유럽화 반기독교화--->무슬림공동체와의 갈등을 유발.

 

6.제국도시 뉴델리의 건설

영국의 건축가 에드윈 루터엔스에게 사자하나바드 남쪽에 도시를 건설하도록 했다.

1921. 1차 대전 기념문인 인디아 게이트.

1926.12. 이 도시를 뉴델리라 이름 짓고, 1931.2월 제국의 수도로 공식 출발

총책임자 루티엔스. 주요건축가 베이커. 행정책임자 하딘지 총독. 나중에 합류한 베이커.

 

7.민족운동의 전개와 종교공동체 갈등

1920년대 델리는 민족운동의 중심지.

1916년 마하뜨마 간디 중심의 민족운동-힌두와 무슬림이 종교와 관계없이 민족운동에 합류.

2차 대전 중. 인도 철수 운동. -6만여 명 투옥.

1944. 인도 파키스탄 분단에 대한 협상 결렬-힌두와 무슬림 사이가 급격한 악화

1947 결국 분단된 체 독립. 1948.1. 간디는 델리에서 힌두 극우단체에게 암살당함.

 

8.분단 후 도시의 팽창

파키스탄과의 분단과정에서 뻔잡 지역 난민들이 델리로 대거 유입.

 

9.경제개방과 세계화 이후의 변화

1980년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 개발 시도

종교 갈등-1984년 시크교도 학살. 1984.10.간디 수상 피격 사망.

1990대 이후 새장개방. IT. 신기술의 발전은 소수에게 혜택이 돌아갔으나, 시민들의 삶은

더욱 빈곤해 졌다. 빈부격차로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심각.

현재 델리개발공사는 2021년 델리 마스터 플랜을 마련. 2021년 인구 3,3001,000평방키 로의 면적.

역사유적지 문화 보전. 아무나 강 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다.

 

 

7장 라틴아메리카의 도시화 및 도시구조

 

1.유럽제국주의 시기 동안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도시

16c에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이베리아 반도 문화를 라틴아메리카에 이식했다.

농촌위주의 지역을 급속한 도시화를 통해 이베리아문화의 주요 요소를 이식했다.

town과 도시건설을 통해 도시를 전초기지로 한 농경기반의 정복이었다.

-수탈 교역을 위해 해안에 건설 - 멕시코시티. 아바나(쿠바) 리마(페루) 리우데자네이루, 살바도르(브라질)

 

2.라틴아메리카 식민지 도시의 형태

중세 유럽풍의 소형의 요새도시 형태. 고대 로마의 격자형 도시계획. 격자형 가로망.

도심에는 정사격형의 plaza 또는 plaza real이라는 광장이 위치.

광장에서 가까운 위치에 최상류층이. 멀어질수록 지위가 낮은 거주지 형성.

스페인-식민지 도시를 기반

포르투칼-농촌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

 

3.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급속한 도시화

1960년 이후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를 상회. 2000년 인구의 3/4이 도시에 거주.

도시화 비율-우루과이91.3%, 아르헨티나89%.베네수엘라 87%, 칠레84%, 브라질81%,쿠바75%

도시화 비율이 낮은 국가는 아이티. 가이아나,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세계 20대 메트로폴리탄 중 4. 멕시코시티.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거대도시 -고밀도의 집약적 토지 이용.

megalopois-(1)멕시코시티-푸에블라지역 (2)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산투스-캄파니스지역.

(3)부에노스아이레스/몬테비데오-로사리오지역.

 

4.라틴아메리카의 도시구조

1.도시 중앙에 도심 또는 inner city가 위치하며. 도심은 일반적으로 거주지, 시장. 중심업무 지구

(CBD :Central Business District)로 구성되어 있다. CBD-상업 교통 행정의 중심지.

2.spine 자동차 교통위주의 간선도로를 지칭한다. 간선도로변에 상가가 형성됨.

CBD와 교외지역의 대형쇼핑몰을 연계하는 spine을 따라 엘리트 거주 지역 및 상업지구가 형성되었다.

3.새로운 교외지역등장 및 개발- 교외지역 쇼핑몰 산업파크. edge city가 형성.

더 이상 CBD 에 의존 않고 독립. (edge:가장자리, 교외)

4.periferico(교외)라고 불리는 도시외곽 환성도로.

5.불쾌적 회랑지대-낙후 황폐한 지역

6.성숙지대-중산층 거주 지구.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거나 역사 전통지구로 재개 발이 이루어진다. gentrification이란 낙후 쇠퇴 황폐해 가는 도심의 노동자 계층 근린지구로 상류층이 이주해 오는 현상.

즉 낙후한 도심에 고급거주지가 개발되는 현상-신상류층이 등장.

라틴아메리카내 거대도시(megacity)또는 세계도시의 특색-사회경제적 양극화 및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른 거주지 분리의 심화.

7.첨가지대- 이 지역은 성숙지대의 외곽에 위치. 새로운 주택지구 및 상업지구가 형성

8.공유지불법 점거 거주 지역-판자촌 빈민가 지역. 가장 외곽에 빈곤지대.

 

도시구조상 또는 토지 이용상 라틴아메리카 도시와 앵글로아메리카 도시간의 차이

도심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토지의 경제적 가치가 줄어들며, 사회경제적 위치가 낮아진다.

반면 미국 캐나다 등 앵글로 특징은 도심주변지역이 빈민 슬럼 쇠퇴 낙후황폐하고, 부유한 중상류층이 교외에 거주.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토지의 경제적 가치가 증가하고 지위가 높아짐.

 

 

 

8장 후기 산업사회의 다문화도시, 로스엔젤레스

 

1.LA의 범위와 도시 형성 과정

세계적으로 12번째, 미국 내 두 번째 인구.

1846년 미국 멕시코전쟁-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캘리포니아를 미국에 양도.

LA1850년 미국의 영토가 됨.

1848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금광 발견. 1876년 대륙횡단철도.

태평양에 위치. 태평양진출 교두보역할. 1914년 파나마운하 개통.

 

2.도시의 입지조건과 자연지리 특성

사빈 해안인 산타모니카 만. 砂濱海岸 : 파도의 작용에 의하여 모래가 많이 퇴적하여 형성된 해안 지형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 분지의 특성-스모그현상. 연기와 안개.

동쪽은 넓은 사막. 남부는 하천이 매우 드물게 분포.

중북부는 습윤 지역 -用水가 제일 큰 문제. 지진지대. 산불 빈발과 chaparrral이라는 휘발성 풀.

주거지 확장으로 겨울 우기철에는 심각한 홍수와 산사태

 

3.산업재구조화와 경제 환경의 변화

1892 유전개발. 석유화학 발달. 항공(록히드). 자동차. 군수산업. 전기전자관련 하이테크 산업 발전.

1965 이민법 개정으로 대규모 노동력-의류봉제 노동집약 산업. 영화 등 노동집약적 산업

-LA에서는 예외적으로 발전.

 

4.모자이크문화의 도시: 인종-민족 집단 관계와 거주지 분리 현상

백인인구 비율 큰 폭으로 감소. 아시아인과 라티노 인구비율은 크게 증가. 흑인비율은 큰 변동 없음.

라티노가 캘리포니아 40.3%. 백인인구 39.%를 능가하는 최다수 인종.

최근 교외의 민족 집단 거주구역(ethnoburb)형성- 동쪽외곽 몬티레이 파크에 차이나타운

오렌지 카운티에 한인 집적지역. 따라서 인구구성의 배경이 가장 다채로운 대표적인 다문화주의 도시가 되었다.

인종 민족별 분리현상- 백인들의 빗장공동체(gated community)와 요새화된 도시는

점점 더 먼 원거리 교외지역으로 나가면서 형성되며, 최근 재개발 과정을 격고 있는 다운타운에서도 형성되고 있다.

최근에 소위 외곽도시(edge city)라는 원거리 외곽의 자족도시들이 LA의 거대 도시권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5.LA는 미래 세계도시의 전형인가?

 

후기산업사회에 도시 성장 산업의 변화는 어떻게 전개되나?

-자본과 노동력의 국제이동이 세계도시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합될 것인가.

-증가하는 이민지 집단에 의해 세계도시의 다문화주의는 어떻게 인종-민족관계를 형성하나.

-새로운 기능들이 도시 내에서 전개되면서 기존 도시기능의 공간적 전개양상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9. 뉴욕 세계정상도시

 

2018년 기준으로, 세계인구의 55.3 퍼센트가 도시에 있다.

백 년 전에는 세계인구 열 명 중에 두 명만이 도시에 살았지만, 지금은 열에 다섯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이미 세계에는 인구 백만 명이 넘는 도시가 548, 인구 30만이 넘는 도시가 1,860개가 있다.

세계 GDP80퍼센트가 도시에서 나오며, 세계 GDP20퍼센트는 열 개의 대도시에서 나온다.

 

뉴욕 중심의 대도시 통계 지구의 면적은 11,880제곱킬로미터로서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도시권역이다.

또한 그 인구는 미국에서 가장 많다(2017년 기준으로 2030만 명).

지구상에는 인구 천만 명이 넘는 메가시티(중국에서는 이를 초대도시라고 부른다)가 모두

33개가 있고 그 중 북미에 두 개의 메가시티가 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다.

 

2015년 기준 뉴욕의 총생산은 약 850억 달러로서, 세계 20위 정도의 사우디아라비아나

스위스의 국가총생산보다도 많다. 뉴욕의 인구는 850만 명, 일자리 467만 개에 달한다.

뉴욕은 1785년에서 1790년까지 미합중국의 수도였고, 1789년에 뉴욕에서 조지 워싱턴은 취임식을 했다.

미국독립 후인 1800년에 미국 최대의 도시는 인구 7만의 필라델피아였는데, 맨해튼 인구는 6만에 육박했다.

 

지식, 산업, 교역이라는 산업근대도시의 세 가지 핵심기능들에서 뉴욕은 19세기 중반 미국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나아가 20세기 초 미국은 제국에 준하는 지위를, 뉴욕주는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라는 이름을,

뉴욕은 제국의 수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제국을 표방한 뉴욕의 건물들 중 가장 유명하기로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다.

이 건물은 1931년에 맨해튼 33-34번 스트리트에 세워졌고 한동안 맨해튼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명성을 확립했다.

 

뉴욕이 성장하는데 애초에 기반이 되었던 산업은 유럽과 미국내륙을 잇는 무역업이다.

이어서 의류산업. 오늘날 뉴욕 경제를 말할 때 우리는 뉴욕의 금융업을 말할 수밖에 없고,

또한 맨해튼의 금융지구(파이낸셜 디스트릭트)와 월스트리트를 말할 수밖에 없다.

뉴욕은 금융중심지로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세계의 금융중심지들의 경쟁력을 비교평가하는 지수인 글로벌 금융중심 지수(Global Financial Centres Index, GFCI)’에 따르면,17)

2019년 기준으로 뉴욕이 1위를 차지하고 그 뒤를 런던, 홍콩, 싱가포르, 상하이, 도쿄, 베이징이 따르고 있다

(서울은 36 ).

뉴욕증권거래소는 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오늘날 뉴욕의 금융직종 종사자 33만 명 중

90퍼센트가 맨해튼에 모여 있고, 이들의 평균임금은 뉴욕 평균임금의 네 배에 이른다.

금융업의 지위는 글로벌화와 더불어 더욱 강화되어 왔다.

 

금융업과 생산자 서비스업의 호황에 편승해서 성장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뉴욕의 핵심사업은 부동산 사업이다.

뉴욕의 일자리는 다른 미국도시들에 비해 다양하지 못하다. 이는 증권업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뉴욕은 실리콘밸리(샌프란시스코)를 제치고 IT 선도도시의 지위를 노리고 있다.

 

 

10. 서안과 낙양

 

서안사변- 1936.12. 장학량이 장개석을 화청지에 납치. 구금한 사건. 국공합작을 강요.

서안- 西周~까지의 수도. 13개 왕조의 도시. 진시황의 병마용.

당나라에 와서 장안으로 됨. 周代:호경. :함양(아방궁). :장안. 유방이 장락궁을 지었다.

:서안로. 明代부터 서안.

 

낙양 黃河洛水(물의 북쪽) 洛陽. 낙양 주변에 洛邑 洛州.

항우가 서안을 불태웠기 때문에 유방은 서안-낙양을 오가며 생활.

공식적으로 서안이 도읍. 서안을 재건설함.

 

明堂- 儀禮上- 周禮에 의함.

王莽의 명당. 前漢-> 왕망(4~25) ->後漢(유수 (광무제)-도읍을 낙양에 두고. 명당을 짓는다.

한나라 반고(후한 초기 사람)-건축물을 묘사하는 시를 지었다.->양도부

 

<보충설명>

 

중국은 서북방에서의 외세방어와 정복이 주를 이루는 때에는 서안을 중심으로 삼고,

왕조의 안정과 유지를 꾀할 때에는 낙양을 중심으로 삼는 경향이 강했다.

 

長安은 오래전부터 주()나라의 수도 서기(西岐)와 전국시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이 장안 부근에 있었다.

기원전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장안이라고 불렀으며,

618년에 는 당()나라의 수도가 되어 300년간 국제도시로서 융성하였다.

() 왕조가 중원을 차지하는 기원전 11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6세기~9세기의 당대에 이르기까지

그 일대가 수도권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이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라고 할 수 있다.

 

洛陽은 역대로 중요한 거점 도시였으며, 기원전 771년 동주(東周)의 수도가 된 이래 후한(後漢),

조조(曹操)의 위() 등을 거쳐 오대(五代)시대 후당(後唐)까지 아홉 왕조의 수도였다.

기원전 8세기로부터 당대 기원후 9세기 무렵까지 주요 왕조의 수도로 세워졌던 낙양 또한,

서안만큼 수천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중요한 고도(古都)이다.

 

장안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무제(武帝)이다.

무제가 세운 건축물들은 무제 자신의 불사(不死)의 꿈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 상징 및 소유물로서 지어진 것이 되었다.

무제에게 허구적인 낙원을 현실적으로 창조할 수 있도록 기여한 문인들의 대표는 바로

사마 상여(司馬相如: 기원전179-117)였다. 그가 쓴 부 작품을 읽고 감탄한 무제는 그를 찾아서 새로운

상림부(上林賦)를 헌사 받고 황실 원림을 새롭게 꾸미기 시작하였다.

 

전한 시대 말엽에는, 장안에서 의례상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바로 왕망(王莽)의 명당(明堂)이다.

기원후 1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당시 섭정이었던 왕망은 무제의 화려한 건장궁과 상림원의 많은 건축물들을 파괴하고

그것으로 유가적 전통건물을 짓는데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건축이 바로 명당이었다.

스스로 성왕의 정통계승자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낙양이 서안과 함께 두 개의 대표적인 수도로서 대비되고 노래되는 시기는 바로 후한 시대부터이다.

그 첫 번째 시작을 연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자 문장가였던 반고(班固)이다.

서안과 낙양이 함께 대비되어 노래된 첫 번째 작품은 그가 지은 양도부이다.

 

광무제 갱시(更始) 원년(23) 곤양(昆陽)에서 광무제 유수(劉秀)가 이끄는 병력이

수십만의 왕망의 대군을 패퇴시키고 이 패전을 계기로 왕망의 멸망은 가속화되었다.

갱시제와 호족들의 연합군이 왕망 정권을 멸망시켰다.

 

전한 시기 장안의 역사는 기원전 202, 한 고조가 위수 계곡에 수도를 세운 때로부터 시작되었고,

마지막은, ‘수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배고픔으로 죽고, 도시는 폐허가 되어버렸으며

화려했던 종묘와 능묘들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던기원후 25년에 끝났다.

 

대부분의 고조의 신하와 장군들은 낙양을 선호했지만, 루경(婁敬)이라는 보졸이 궁정으로 밀치고 들어와

황제 면전에서 당신이 만약 주()나라보다 더 큰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

군사적 정복으로 이제 막 권력을 쥔 한나라가 같은 방법으로 통치를 유지해야 하고,

그렇다면 전략적 위치와 지세로 보아 장안이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주장하였다.

루경은 고조의 핵심 참모인 장량(張良:-기원전 189)의 지지로 고조를 납득시켰고

그날로부터 장안의 200년 역사가 시작되었다.

 

3.2. 서안(서도)의 주요 건축 : 반고는 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한의 도읍인 장안인 묘사하는 동시에,

후한 시대 도읍 인 낙읍(洛邑)을 그와 대비하여 예의 도덕의 도시로 묘사하여 찬양하게 되었을까?

반고가 말하려는 초점은, 처음부터 예의의 법도를 구현하는 도시 낙양이다. 광무제의 낙양 도읍의 뜻이 그러했고,

명제 때 의례를 거행하던 낙양의 모습이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서도빈이 그렇게 줄줄이 꿰어 말하던 궁전, 이궁, 누대의 명칭들에 비해

동도주인 언급하는 건축물은 오직 한 가지이다. 바로 삼옹(三雍)’이다.

이것은 의례를 거행하는 것과 아주 깊은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건물이다.

동도부에 출현하는 유일한 건축물, ‘삼옹은 바로 명당벽옹영대를 가리킨다.

 

 

 

11강 모스크바

러시아의 심장. 역사를 만든 모스크바.

키에프(발원지)->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는 12~13세기 몽고로부터 러시아가 독립하는 과정의 수도였다가.

15~16세기 민족국가를 이루고

18~19세기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김

 

모스크바는 중세에는 작은 마을. 13세기말 세력을 겨루는 도시국가로 성장.

이반 갈라타에 의해 강력해 짐. 갈라타는 돈지갑이라는 별칭이 있어. 이 돈으로 몽골에 조공을 바치다가,

15세기중반 이반3(1480)부터 공식적으로 조공을 거부하고 독립이 되었다. 전영토를 통합했다.

 

수도를 옮기다

17세기 (표토르 1세 황제)빠르게 근대국가로 성장. 러시아는 제국으로 발돋움.

개혁과 근대화의 요구로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모스크바는 귀족과 정교회 때문에 문제- 모스크바 토착세력이 발전에 발목을 잡았기 때문.

상트 페테르부르크 200년간 수도.

 

19세기 나폴레옹 침공과 1812년 퇴각할 때 모스크바 대 화제

이후 유럽에 걸 맞는 제국 규모로 재건.

19세기 초 러시아 혁명->다시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김. 사회주의 이념 부각.

아방가르드. 구축주의 건축물은 사회주의 이념을 표현.(혁신적. 기하학적추상미술운동)

소비에트연방의 붕괴-1990년대. 시장경제와 소연방주의

2000년대 푸틴-현대화 국제화로 발전. 금융과 비즈니스 중심지로 부상.

 

 

12강 런던

 

13장 산티아고 순례길

 

 

 

제 장 함부르크: 하수처리 시스템의 변천을 중심으로

 

1.도시와 폐기물

고형폐기물-지상에서 처리. 가장 많은 관심

액체폐기물-땅속에 묻힌 관으로 배출. 관심을 끌지 못한다. 각종 생활하수

기체폐기물-가장 적은 관심. 연소로 인해 대기 속으로-과거 굴뚝의 높이로 조절했다.

 

2.함부르크의 물 수급과 하수처리

함부르크는 엘베 강 하류에 위치. 독일 북해와 엘베 강이 합치는 데서 동남쪽 110km.

온대기후. 사계절 분명. 10. 717. 평균 강수량 71mm

소변.대변.음식찌꺼기-구덩이에 모여-농촌 퇴비로 이용. 일부는 그대로 강으로 흘러 티푸스.

콜레라 전염병 위험.

 

3.함부르크의 하수관 건설과정

1842. 복잡한 하수관의 건설이 시작 -위생적 식수공급과 연결.

비판자: 유스투스 리비히. 건식화장실 이용과 퇴비화를 주장.

찬성자: 하수처리. 오물처리방식 주도. end-of-pipe-technology는 환경에 큰 영향.

수세식 변소-영국에서 처음 발명 보급 -도시 전체로 퍼진 것은 함부르크.

식수위생문제: 1892년 수만 명의 목숨을 빼앗은 콜레라 원인.

퇴비원이 줄어들자 인공비료생산이 늘어, 그 결과 자연의 영양물질 순환은 파괴

 

4.함부르크의 하수처리장

1912~1938. 11개의 하수처리장

1937. 인구 120만으로 증가

1930. 엘베 강에서 물고기 대규모 떼죽음.

1985.하수관 총연장 4,844km. 1998. 131,400km.

 

5.함부르크의 하수관 종류와 처리 용량

19c. 벽돌을 쌓아서 600km. 11%/ 돌을 쌓아서 2,339km. / 나머지는 콘크리트

함부르크 지하에 500만 마리의 시궁쥐-하수오염

비가 왔을 때-하수가 3. 최대 10~100배 늘어나. 하수처리량은 비가 안 올 때의 2.5배뿐

 

6.하수처리과정

1999. 이래 하수는 하수처리장으로 집중된 수 처리.

해마다 5,520톤의 여과물 발생-슬러지와 함께 연소 처리/ 모래 1.440-건축물에 사용.

하수에 포함된 탄소와 질소화합물을 분해하는 미생물-많은 양의 산소를 필요.

탄소화합물 분해 -화학적 산소요구량을 94% 감소시키고/ 생화학적 산소요구량은 5일 안에 98%감소시킨다.

하수처리를 통과한 하수는 6%의 화학적 산소요구량, 2%의 생물학적 산소요구량을 가지고 엘베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하수에 포함된 질소화합물은 암모늄염인데. 이는 미생물에 의해 질산염으로 바뀐다.

첫 단계에서 미생물에 의해 질산염으로 바뀌고 두 번째 단계에서 기체상태의 질소로 분해되어 대기로 날아간다.

이 과정을 통해 하수의 질소함량은 71% 줄어든다.

후처리-마지막 단계. 하수에 포함된 인산염은 침전처리로 92% 제거. 이를 위해 철의 염 수용액을 첨가.

 

7.슬러지 처리

발효를 거쳐 유기물의 50%를 가스와 물로 분해. 유기질소화합물은 수용성 암모늄 화합물로 변화.

발효되어 생긴 가스는 연소되어서 전력생산에 이용. 발효된 슬러지 무게는 40%줄어들어.

소각장에서 매일 118톤의 슬러지와 15톤의 여과물이 소각되며 남는 물질은 매일 58톤이 되는데 90%가 재.

9%는 석고. 1% 중금속 슬러지. 재와 석고는 재사용. 중금속은 매립. 상당량의 에너지 소요.

 

8.맺음말

농업용으로 이용되던 분뇨가 그대로 강으로 버려져 결국 인공비료의 사용을 증가시켰다.

분뇨에는 많은 양의 인이 포함. 인은 농업에 필수 영양소인데 그냥 버려지고 있다.

해결방안- 도시 안에서 순환 시스템을 되살려야. 또 도시에서의 소규모 농업이 살아나야 하고.

식수와 하수가 소규모 정화과정을 거쳐서 순환될 수 잇는 시스템이 확대되어야하며,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면서 태양 에너지와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를 널리 사용해야만 한다.

 

존경하는 이필렬 교수의 매우 꿈같은 소리다. 먼 훗날 지구가 멸망하고, 다시 탄생한다면 모를까.

세상은 이런 학자들이 있어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이다.

 

 

 

제 장 친환경도시의 모범. 프라이부르크

 

독일의 환경수도. 독일 남서부의 흑림으로 둘러싸여.

특히 보봉은 프라이부르크 남쪽 3km. 1944년부터 10년에 걸쳐 새로 개발된 신도시.

2차대전 프랑스군이 접수. 1991년 독일 통일 후 철수.

 

5000명 거주. 지속가능한 마을을 계획. 포룸 보봉이라는 시민그룹이 적극 참여

단독주택이 하나 없이, 5층 정도의 공동주택. 타운하우스.

지속가능한 에너지 컨셉. 연간 난방에너지 평방m65kwh 이하 소비토록

파시브하우스-에너지 자체조달. 난방에너지 연간 13kwh. 1인당 가정용전기 소비 400kwh

일반적인 소비량에 절반밖에 되지 않음. 진공변기 사용. 물 절약. 분뇨는 바이오가스로 바꿔 에너지 생산에 이용.

 

잉여에너지 주택단지-태양건축가 롤프 디쉬의 작품. 태양을 향해 돈다는 그리스 말의 헬리오트롭.

외부지름 11m 3층짜리 원통형. 생태적 나무사용. 단열유리. 완벽한 단열재. 지붕 위 태양광전지판. 태양열 온수시설.

지중 열 교환장치. 빗물이용시설. 퇴비화 변소. 갈대를 이용한 하수처리시설.

롤프 디쉬의 잉여에너지 주택단지는 150채의 집으로 이루어져. 에너지 소비보다 생산이 더 많아

잉여에너지주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벽은 두께 30cm의 무기질 섬유(암면). 창문 유리 아르곤 기체로 채워져. 자동환기장치 작동.

열교환기로 열손실 최소화.

보봉 구역의 교통 컨셉: 차가 다니지 않게 좁게. 자동차는 세어링.

널찍한 우수로-따로 우수관 설치가 필요없게 된다. 독일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는 것.

포룸 보봉이라는 그룹이 계속 활발하게 활동하여 지속가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