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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적지- 서오능

甘冥堂 2020. 11. 9. 10:32

교재 속 조선시대와 관련된 부분을 읽고, 자신이 조선시대 유적지를 둘러본 경험을 정리할 것. [30]

 

서오능 답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는 어릴 적부터 놀이터삼아 놀던 곳 서오능이 있다. 용두동이라는 동리는 윗말, 아랫말, 건너말, 벌말 등으로 나뉘고, 그중 윗말을 발왕손이라고 하였으며 벌말을 창릉골이라고도 불렀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용두리는 오래전부터 왕릉이 존재함에 따라 조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20km쯤 서쪽에 용미리가 있어 용두리(용머리)와 용미리가 산세에 의해 이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1.서오능의 구성

 

능묘에서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을 뜻하고, ()는 왕릉을 제외한 무덤을 뜻한다. 서오능의 각각의 명칭과 매장된 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의 능인 명릉은 제19대 숙종(1661~1720)과 계비 인현왕후 민 씨(1667~1701), 인원왕후 김 씨(1687~1757)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 으로 조영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 쌍릉과 단릉, 동원이강의 특이한 형식을 볼 수 있다.

 

2) 敬陵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은 추존 왕 덕종(1438~1457)과 소혜왕후 한 씨(1437~1504)의 묘로 덕종은 세조의 장남이다. 145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사망해 대군 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지만,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3) 昌陵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은 서오릉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으로 언덕 위에 두 개의 능이 있는 동원이강 형식이다. 창릉은 제8대 예종(1450~1469)과 계비 안순왕후 한 씨(1445?~1498)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인데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기간은 14개월에 불과하다.

 

4)翼陵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고 봉분이 웅장하다. 익릉은 제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 씨(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했다. 인경은 '인덕을 베풀고 정의를 행했으며 자나 깨나 항상 조심하고 가다듬는다.'는 뜻이다.

 

5)弘陵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은 조선 왕릉 42기 중 유일하게 왕의 유택이 지금까지 비어 있다. 장희빈의 묘인 대빈묘를 지나 창릉 방향으로 걷다 우측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1692~1757) 서 씨의 홍릉이 나타난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3세에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결혼했고,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왕비가 되었다. 영조는 생전에 왕후가 먼저 사망하자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장지를 정하면서 장차 자신도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는 왕비 능의 오른쪽 정혈에 돌을 십자로 새겨 묻도록 하고 자신의 터를 비워둔 수릉을 조성했다. 하지만 영조는 지금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영조를 홍릉에 모시지 않고 동구릉 내 효종의 영릉 터에 안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6)장희빈 대빈묘

왕을 낳은 생모는 무덤을 묘에서 원으로 격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희빈은 왕의 생모임에도 폐비가 된 관계로 무덤을 원이 아닌 묘로 칭한다. 서오릉 후미진 곳에 작게 조성되어 있다. 봉분 주위를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장명등과 문인석 한 쌍만 배치되어 있다. 보통 후궁들의 묘소 중 원에는 문인석과 석마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대빈묘에는 석마도 없다. 위치나 전체적인 꾸밈새, 작은 석물 등이 일반 사대부 묘보다 초라해 희빈 장 씨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인장리에 있었지만 묘에 물기가 있다는 상소가 있자 1719(숙종 45) 경기도 광주 진해촌으로 천장했고, 1969년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겨 서오릉의 숙종 곁으로 이전했다.

 

2. 19대 왕 숙종에 대하여

 

숙종은 1661(현종 2) 815일에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효종은 명성왕후의 침실에서 용이 이불을 덮고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효종은 원손을 얻을 좋은 징조로 여겼는데, 효종이 죽고 2년 후에 숙종이 태어났다. 이름은 순(), 자는 명보(明普)이다.

 

아들을 몹시 아낀 현종은 조신들 중에서 송시열, 송준길, 김좌명(金佐明), 김수항(金壽恒) 등을 특별히 뽑아 원자의 교육을 맡겼다. 숙종은 1667(현종 8)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현종 15) 818일에 현종이 죽자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비교적 어린 나이인 14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 많은 대신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큰소리를 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는 즉시 유배를 보내거나 사사하는 등 왕으로서 과단성 있는 면모를 보였다. 부왕인 현종이 재위하는 내내 신하들에게 왕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휘둘리던 것과는 달랐다.

 

특히 숙종은 격화된 서남당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영민한 왕이었다. 그는 상황에 따라 남인 혹은 서인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패배를 안겨 주는 이른바 환국정치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신하들은 왕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변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지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아야 했다.

 

숙종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한다. 환국이란 국정주도의 세력을 교체시키는 것으로 이러한 환국에는 사람들의 죽거나 다치고 벼슬자리도 당연히 바뀌게 된다. 여기에 더불어 숙종은 중전의 자리까지도 바꿔버리기도 했다.

 

세 번의 환국과 대리청정을 살펴보면 1680(숙종 6) 경신환국, 1689(숙종15) 기사환국,1694(숙종20) 갑술환국, 이어서 1717(숙종 43) 세자의 대리청정으로 이어진다. 숙종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 3년째 되던 해인 1720(숙종 46) 68일에 깊어진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향년 60세였다. 결국 숙종 생전에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리청정을 했던 세자가 그대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3. 숙종과 장희빈

숙빈을 총애하던 숙종은 김인의 고변에서 장희재가 독살하려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남인들을 잡아다가 국문하는 한편 유배되었던 서인들을 불러들였다. 아울러 숙종은 앞서 폐출하였던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다시 후궁으로 강등시킨 후 대궐 한구석인 취선당으로 몰아냈다.

 

취선당에 물러나서 생활하던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중전의 화상을 그려 놓고 궁녀를 시켜 매일 세 번씩 화살을 쏘게 하였고, 수의를 해 입혀서 시체라고 하여 연못 속에 던지는 등 온갖 짓을 자행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숙종이 미행하여 이 모양을 목격한 왕은 그만 노기가 충천하였다. 기도드리던 궁녀와 시비들을 잡아내어 즉석에서 목을 베게 하고 아울러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러나 장희빈은 약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더욱 노하여 몸소 희빈의 처소에 이르러서 전좌하고, 직접 사약을 내렸다.

장희빈은 모든 것이 틀렸음을 깨닫고 체념의 빛을 보이며 애원하였다.

저의 혈육인 세자나 한번 보고 죽게 하여 주소서.”

 

처음에는 숙종이 이를 거절하려 하였으나 세자를 불러 장희빈과 대면케 하였다. 그 아들을 본 장희빈은 별안간에 뛰어 일어나 세자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기왕에 죽을 바에는 이가의 씨를 전하여 무엇하리오. 같이 죽자!”

이렇게 외치면서 세자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이에 놀란 주위의 모든 신하, 시비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당황하였고, 세자는 무참히도 기절을 하고야 말았다.

 

입을 벌려 사약을 넣어라! 천하의 요망된 것!” 숙종의 무서운 호령에 의하여 사약은 장희빈의 입에 부어졌다. 독한 약기운으로, 잠시 후에 온갖 흉악을 떨던 장희빈의 명도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결국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