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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와 서원 - 자운서원 답사

甘冥堂 2020. 11. 9. 10:30

자운서원 답사

 

들어가며

서원은 선현봉사를 위한 공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3(중종)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고 선비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이를 1550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어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 도산서원(1574), 필암서원(1590), 도동서원(1605), 병산서원(1613), 무성서원(1615), 돈암서원(1634)이 이어졌으며, 이 서원들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들이다.

 

이번에 답사한 자운서원은 비록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다.

 

본론

 

1.율곡 이이의 생애

율곡은 사헌부감찰 이원수의 아들로 1536(중종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 때 이름을 見龍(현룡)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른다.

 

율곡은 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로 역임하였으며. 그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이기론(理氣論)을 주장하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퇴계 이황(李滉)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조선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퇴계는 율곡보다 35년 앞서 태어났다. 23세의 율곡을 만난 퇴계가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하며. 한 눈에 율곡의 천재성을 알아봤다고 한다.

 

 

2.자운서원

조선 광해군 7(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1536~1584)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에 의해 창건되었다. 효종 원년에 자운(紫雲)이란 사액을 받았고, 숙종 때 그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두 분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고종 5(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터에서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다. 그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빈터에 묘정비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주변을 정화하였다.

 

자운서원은 2013년 율곡선생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1)서원의 공간과 기능

서원은 사적인 교육공간인 만큼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이곳 자운서원도 읍내인 법원리에서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풍수지리상의 배산임수에 따라 아담한 산에 둘러싸여 있어 문외한의 눈에도 吉地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서원의 구조는 강학과 제향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곳 자운서원은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즉 앞쪽에 학업용 건물을, 뒤쪽에 묘당을 배치한 형태이다.

 

(1) 율곡을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

문성사는 앞면 3, 옆면 3칸의 건물로 서원의 가장 뒤편,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를 지내기에 적합하게 되어있다.

정면에 율곡 영정이 위치하고 그의 후학인 金長生. 朴世采 두 분의 초상이 좌우에 있다. 위폐란 죽은 사람을 모시는 나무패를 말한다. 사당 앞 내삼문을 내려오면 강인당이다.

 

(2)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강인당

사당 아래 전면에 위치한다. 정면 5,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학 공간으로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며 교수의 거처이다. 강인당 양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이 무려 460년이라고 한다.

 

(3)강인당 아래 유생들이 거주하던 기숙사 동재(立志齋)와 서재(修養齋)가 있으며

(4)서원의 정문인 외삼문이 있으며 제향공간의 정문인 내삼문이 있다.

 

(5)서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처음에는 교육시설이 중시되었으나 점차 제향시설 중심으로 만들어지게 되어, 이곳 자운서원도 서책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나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 그리고 휴식과 서회를 열기도 하는 누각이 없다.

 

2)율곡선생 묘소 입구인 如見門(여현문)

가족묘인 이곳은 특이하게도 율곡의 묘가 맨 위쪽에 위치한다.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이다. 문인석이 좌우에 보인다. 율곡 묘 앞에는 율곡의 부모인 李元秀. 신사임당의 합장묘가 있다.

 

3)자운서원묘정비

율곡선생의 덕행을 추모하고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한 화강암 비로 1683(숙종9)에 건립되었으며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글씨는 곡운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다.

 

4)이이선생 신도비

높이 223cm. 두께 39cm 규모의 대리석 비석으로 앞뒷면에 율곡선생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1631(인조9)에 건립되었고 이항복이 비문을 짓고 신익성이 썼다.

 

(5)이이선생과 신사임당의 동상

이 동상은 1969, 1970년 서울시 종로구 사직공원 내에 건립돼 보존돼 오다가 사직단 복원계획에 따라 이곳 파주 이이 유적지로 이전 복원되었다.

 

(6)율곡기념관

1986년에 건립된 2층 팔각정 양식의 건물로 율곡선생 관련자료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3.화석정

이곳 자운서원에서 4km 쯤 떨어진 곳, 율곡선생이 자란 율곡리(栗谷里)로 향한다.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화석정이다. 율곡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종 25년에 세운 것을 증조부 이의석이 화석정(花石亭)이라 명명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화석정 내부 현판에 시 한 수가 걸려있다.

花石亭(화석정) / 李栗谷(이율곡)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 속 정자에는 가을이 이미 깊은데,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네.

遠水連天碧 (원수련천벽) 멀리 보이는 저 강물은 하늘에 이어져 푸르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은 만 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변방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울음소리는 석양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데.

 

율곡이 여덟 살에 지었다는 율시다. 그는 세 살 때 이미 글을 읽었고, 8세에 이 시를 지었다. 10살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고 13살에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이어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화석정에 얽힌 故事.

정자 바로 아래 임진강이 굽이져 흐른다.

이 정자는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니 내가 죽고 없더라도 마룻바닥에 기름칠하는 것을 하루라도 거르지 말거라.” 율곡이 하인에게 당부한 말이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율곡선생은 이 정자가 나라를 위해 쓰일 것이라 예견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백성들을 내팽개치고 몽진했다. 뒤에서는 왜군들이 혜음령을 넘어 급박하게 쫓아오는데 앞에는 임진강이 가로막고 있다.

 

때는 사월 말. 그믐사리에 서해바다의 바닷물 조수는 밀려와 수심은 깊어져 있고

하현(下弦)이 며칠 전에 지나 사위(四圍)는 달빛마저 없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있다. 강을 건너야 했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호종하던 병사가 외쳤다.

저 언덕에 있는 정자를 불태워 뱃길에 불 밝히자.”

 

기름 먹은 마룻바닥이 불을 만나자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며 주변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선조대왕 일행은 무사히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답사를 마치며

 

율곡선생에 대한 유적지는 이곳 외에도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도 있다. 오죽헌은 율곡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곳 사당에도 율곡의 영정과 벼루와 묵 등 문방사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0197월 우리나라 서원 9곳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 살고 있는 일산에서 승용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바로 옆 동네에 이러한 역사유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역사 유적지도 후대인들이 자주 찾아뵙고 선조들의 지혜와 경륜을 배우고 익혀야 향기가 난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우리 고유의 유적을 아끼고 사랑하여 후대에 길이 보존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고:

1.다음백과

2.http://blog.daum.net/won2015/(2016. 10. 30) 필자의 블로그.

3.파주문화원 파주 이이유적관리사무소 안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