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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적지를 둘러본 경험을 정리-행주산성

甘冥堂 2020. 11. 9. 10:26

 

 

행주산성 답사

 

들어가며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에 위치한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문산 쪽으로 가다 보면 왼편 한강 하류 위쪽으로 산성이 보인다. 이 산의 이름은 덕양산이며 산성의 둘레는 약 1km이다. 산성은 동북쪽과 서남쪽의 일부 성벽만 보전되고 있다. 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져서 조선 시대에 대규모 개축이 이루어지고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행주산성을 답사하며 행주대첩과 권율 장군 및 산성 내의 구조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행주대첩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룬 역사적 현장이다. 3대 대첩은, 행주대첩, 한산도대첩. 진주성대첩을 말한다. 행주대첩은 조선 선조 때인 1593년에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장군은 2,300명의 정예군과 승병, 의병, 부녀자 등 3,000명으로 왜병 3만여 명을 물리쳤다. 특히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라 石戰을 벌여 '행주치마'라 했다. 권율 장군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행주대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 부하 장수 조경(趙儆)으로 하여금 목책을 쌓아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7개의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성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는 궁시(弓矢). 도창(刀槍) 외에 변이중이 만든 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으며, 일본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토제(土堤)를 쌓아 조총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1953212() 오전 6시경 일본군의 선봉이 나타났다. 성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 총통(銃筒) 등을 쏘아대고 강궁의 시위를 당겼다.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혼비백산하고 물러났다. 이렇게 일본군 6개 부대를 물리치자,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7대장 고바야카와는 서북쪽 子城을 지키던 승의군의 한 귀퉁이를 뚫고 성안에까지 돌입하였다. 이때 권율 장군은 대검을 빼 들고 승의군에게 총공격을 명하면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도록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다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성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하다는 상황을 눈치 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는 순간, 마침 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치려고 하였다. 이에 당황한 적군은 성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안의 관군도 이를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적군이 버리고 간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한 후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1593227(음력 127) 벽제관에서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의 일본군과 격돌,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이 명군을 패퇴시켰다. 명군의 이여송은 포위되어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그의 부장 이유승이 간신히 구해낼 정도였다.

 

2.행주대첩의 숨은 공로자 - 화차와 신기전

적은 인원으로 열 배도 넘는 적병을 물리쳤다는 것은 좋은 전술과 함께 뛰어난 무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군의 화차는 왜군의 조총보다 더 뛰어난 무기였다. 조총의 사정거리가 50~100미터에 불과했던 데 비해, 화차는 조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첨단 화약무기였던 것이다.

 

1)왜군을 물리친 화차.

300개 이상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화차 위에 신기전기 혹은 총통기를 설치하고 100개의 신기전을 놓거나 사전총통 50개를 놓고 이것을 차례로 점화하여 발사하는 것이다. 특히 1개의 사전총통에는 4발의 세전을 장전할 수 있으므로 모두 200발의 세전을 연발로 발사할 수 있었다.

 

2)신기전(神機箭)

신기전은 세종 때부터 역사에 등장하여 활발히 사용된 화약무기로 1477년 편찬된 국조오례의 서례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그 설계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세계우주항공학회(IAF)는 이것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 설계도로 공인한 바 있다.

 

신기전에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그리고 산화신기전이 있었다. 전체 길이 5.6미터, 약통 길이 70센티미터로 크기가 가장 큰 대신기전은 주로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서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오랑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물이 흐르는 너비를 감안하면 그 사정거리가 1.5~2킬로미터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작은 소신기전은 맨 앞에 발화통 대신 화살촉을 달았으며 사정거리는 100~150미터였다.

 

왜군의 조총에 맞서 조선군은 모든 화약무기를 동원하였다. 개인발사용인 사전총통과 적군이 접근할 때 던지는 수류탄인 지화통뿐만 아니라 자그마치 40대의 화차가 동원되었다. 신기전은 소리와 모습뿐 아니라 폭발력도 컸기 때문에 왜군의 기세를 꺾는 선제공격용 무기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2.권율 장군

권율 장군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권율 장군은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였으며 여타 양반자제들과는 다르게 조선팔도를 다니며 산천과 강을 살피며 지식을 쌓았다. 늦은 나이 46세에 첫 과거를 보고 관직에 들어섰다. 젊은 시절의 풍부한 경험이 행주산성의 전투를 대첩으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권율 장군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있다.

 

3.행주산성의 구조

행주산성은 흙을 이용해 만든 토축산성으로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형식이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1)행주산성 입구인 대첩문

주차장 및 고양시 시정연수원 옆길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통하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산성의 입구인 대첩문을 지나자마자 권율 장군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권율 장군과 행주대첩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다.

 

2)행주대첩비

정상에 오르면 대첩비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幸州大捷碑'가 새겨져 있다. 대첩비 주위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3)대첩 비각

이 비각 안의 초건비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의 문장과, 명필 한석봉의 글씨였으나 비문은 닳아져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4)충장사

충장공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삼도문 뒤에 지붕 일부분만 보인다.

충장사 삼도문의 가운데 문은 이 출입하는 문이고,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맺으며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왼쪽 끝 원흥지구 아파트단지 너머에 그리운 고향 집이 있다.

어릴 적, 행주산성 아래 샛강에서 조그마한 게와 새우를 잡던 기억이 새롭다. 행주산성 밑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은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에워싸고 흐르는데,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厭家鷄愛野雉(염가계애야치)라는 말이 있다. 내 집의 씨암탉을 놔두고 들 숲의 야생 꿩을 좋아한다는 말로, 제 것 좋은 줄 모르고 곁눈질만 한다는 뜻이다.

 

행주산성.

내 고향에는 서오능을 비롯 벽제관, 서삼능. 그리고 오늘 답사한 행주산성 등이 있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유적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진 곳, 더구나 남의 나라 유적지를 돌아다닌다. 내 나라 내 고장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하였음을 후회한다.

 

행주산성 일대에는 행주서원, 행주성당, 행주산성 역사누리길, 고양시정연수원 등의 명소와 잘 가꾸어진 휴식공원이 있어 하루 일정으로는 나무랄 데 없다. 내 고향에 이러한 역사유적지가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며 행주산성 답사를 마친다.

 

 

참고: 1. 다음 백과

2. http://www.kisti.re.kr (과학향기)

2. 무님의 역사이야기에서 읽기 및 행주산설 해설사의 설명

3. http://blog.daum.net/won2015(2017.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