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해병 짜빈동 전투

甘冥堂 2024. 3. 4. 09:36

너희가 짜빈동을 아느냐?

1967년 미국 시각 2월 15일 아침, 베트남에서 날아온 미국 UP 통신의 한 장의 사진은 미국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빨간 큰 제목으로 “신화를 창조한 한국 해병대”
까만 소제목으로 “베트남전에서 청룡해병의 활약은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미 해병대 제임스 듀란 대령
그 사진 속에는 갓 20대 초반의 한국 해병 청룡부대 병사가
4시간에 걸친 적 10대 1의 엄청난 전투가 끝난 뒤의 전장의 참혹한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걸작이었다.

어느 어린 병사가 자기 키만 한 M1 소총을 앞에 던지고 방탄복을 반쯤 걸친 상태로
오른쪽 가슴에 수류탄을 하나 달고, 상체를 비스듬히 어느 묘비에 걸치고 지쳐서 퉁퉁 부은 눈으로 오른쪽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치렀길래,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으로 눈을 감을 힘도 없이 저렇게 얼이 빠지게 되었을까?

정경진 대위가 지휘하던 해병 청룡 11중대가 방어하는 짜빈동은
베트남 중부의 호찌민루트가 가로지르는 추라이 비행장과 인접한,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들은 작정하고 짜빈동 탈환을 노렸다. 그리고 ‘강철연대’라는 별명과 함께 호찌민이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월맹 정규군 2,400여 명을 작전에 투입했다.

그와 맞서는 아군은 모두 합하여 294명으로,
적들이 무장한 개인 화기는 소련제 자동소총 AK-47인 데 비하여
너무 초라한 2차 대전과 6.25 전쟁 때 쓰던 M1 개런드 소총이었다.

베트남 시각 2월 15일 04시 10분 짜빈동,
요란한 포 공격 뒤에 대낮 같은 조명탄 아래 마치 인해전술을 펼치듯 몰려오는 월맹군을 보며
정경진 대위는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첫째, 적이 유효 사정거리 내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하지 말 것.
둘째, 해병대의 명예와 전통을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셋째, 죽음으로서 진지를 사수하라 이상”

그렇게 4시간을 넘게 2,400명의 월맹군은 빼앗으려 했고,
294명의 청룡해병은 지키려고 하는
사상 최악의 혈투를 벌였다.

08시 30분, 저들은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해병 청룡 11중대에 기가 꺾여 마침내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짜빈동 전투가 끝났다.

날이 밝은 짜빈동에는 뿌연 화약 연기와 피비린내의 묘한 향이 감돌았고, 아비규환 생지옥이 펼쳐져 있다면 바로 여기가 그곳이었다.

“적 사살 246명, 추정 사살 60명, 아군 전사자는 15명, 부상 33명”
2,400: 294의 믿을 수 없는 전과였다.

이 전투 소식으로 6· 25 때 자유를 위해 만리타국에서 희생한 미군 참전용사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을 처음 안 미국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6· 25 참전용사들은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의 이 병사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16년 전에 똑같이 겪었던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의 한 전쟁을 생각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아군 294명: 적군 2,400명이라는 10대 1이라는 병력 차이를 극복한
믿어지지 않은 신화 같은 전투 소식에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해하며 무척 놀랐다.

이렇게 놀라기는 그날 아침 짜빈동 현장으로 헬기로 날아간 미 3 해병군단 사령관 웰트 중장도 마찬가지였다.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군이 동맹군으로 참전했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군은 달랐다.
공산세력과의 동족상잔의 전쟁을 경험한 나라이기에 그 임하는 정신력이 대단했다.

그래도 그렇지, 말도 안 되는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군에게 수적 열세로 괴멸당할 줄 알았던, 짜빈동 전투의 대승 소식을 듣고, 설마 해서 급히 헬기를 타고 작전지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믿지 못할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두르고,
해병 청룡 11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대원들에게 최고 경의를 표했다.

같이 간 제임스 듀란 대령과 종군 기자단은 연신 카메라를 누르고
이 믿지 못할 광경과 전과를 미 본국으로 급히 송신했다.

웰트 중장은 중대 단위 전투로서는 처음 보는 대단한 전과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속히 미 국방성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사실 이 전투는 베트남전쟁을 통틀어 단일 작전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쾌거였다.

베트남의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까지 추라이의 청룡부대 본부로 날아와 기적과 같은 전과를 브리핑을 받고 연신 부라보를 외쳤다.

그 후 짜빈동 전투의 영웅들은 11중대 장병 전원이 1967년 3월 1일부로 베트남전 사상 전례가 없는 영광스러운 전원 일계급특진을 했다.
그리고 한국정부도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 김용길 중사와 배장춘 하사에게는 을지무공훈장, 김기홍 중위, 김세창 중위, 김성부 소위, 김준관 하사, 오중환 하사, 이영환 하사, 이 진 해병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하였다.

또한, 1968년 미 국방성이 뽑은 최고 부대로 선정되어,
자국군이 아닌 한국 동맹군이 최고 부대 표창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미 3 해병 사령관 웰트 중장이 남긴 이 말은 두고두고 회자 되었다.
“이 해병들이 아군인 게 정말 다행이다. 만약 적으로 만났다면 큰일 날 뻔했다”

세계 각국은 백병전에 쓰인 한국 태권도를 앞다투어 도입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전투를 계기로 미 국방성이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M1 소총을 현대적 소총인 M16으로 대량 교체해 주는 전환점이 되었다.

월맹군 총사령관 호찌민은 치욕스러운 이 전투 이후, 짜빈동이라는 지명을 없앴고,
월맹 정규 군과 게릴라부대인 베트콩에게 새로운 지침을 하달했다.

“한국군 중에서 얼룩무늬에 빨간 명찰을 단 부대와는 절대 전면전을 하지 말고 피하라.”

오늘이 바로 우리가 잘 모르는 그 날이다.
‘신화를 남긴 해병’의 명예는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흘린 핏자국 위에 세워졌다.


눈물이 난다.
같은 해병대원으로 이 소식을 훈련소에서 들었다.
아, 나도 참전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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