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그리고 늦깍기 공부

李山海의 시

甘冥堂 2024. 4. 19. 19:57

정각(正覺)의 시권(詩卷) 앞머리에 쓰다[題正覺詩卷]

 

醉石罷垂釣 (취석파수조) 낚시질 그만두고 취하여 바위에 누워

煙波歌濯纓 (연파가탁영) 물안개 자욱한 강가에서 탁영(濯纓)의 옛 노래 부르노라

平生水雲癖 (평생수운벽) 평생 자연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暮年江海情 (모년강해정) 늘그막에도 강가에 살고 있네

野老與爭席 (야로여쟁석) 촌로와 자리나 다투며 지내는 몸이니

荷衣休道名 (하의휴도명) 은자라 부를 것 없소이다

沙頭笑相指 (사두소상지) 모래톱에서 웃으며 함께 가리키네

三角鏡中明 (삼각경중명) 거울 같은 한강수에 또렷한 저 삼각산을

 

白髮老居士 (백발노거사) 백발의 이 늙은 거사는

遊戲於斯文 (유희어사문) 사문(斯文)에 노닐고 있는 몸이지만

覺也何爲者 (각야하위자) 정각(正覺)은 무엇 하는 사람이길래

求詩辭意勤 (구시사의근) 이리도 간절히 시를 구하는가

胡寫五字詩 (호사오자시) 함부로 쓴 오언시(五言詩)

溪藤風雨飜 (계등풍우번) 종이 위에 비바람 몰아치는 듯하네

持歸愼勿播 (지귀신물파) 가지고 가 남에게 보이지 마시게

從今深閉門 (종금심폐문) 이제부터 문 닫고 숨어 살려 하나니

 

 

*취하여 바위에 누워: 원문의 취석(醉石)’은 도연명이 취하여 누워 잤던 바위로서,

여산(廬山)의 명승지 중 하나.

*탁영(濯纓)의 옛 노래: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서, ()나라 굴원(屈原)

어부사(漁父辭)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란 구절이 나온다.

*은자라 부를 것 없소이다: 원문의 하의(荷衣)’는 연잎으로 만든 옷인데,

전설 속 은자들이 입었다는 옷을 가리킴.

*종이 위에: 원문의 계등(溪藤)’은 섬계등(剡溪藤) 즉 섬계지(剡溪紙)를 가리킴.

섬계지는 절강성 섬계(剡溪)의 등나무로 만든 이름난 종이.

 

-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아계유고(鵝溪遺稿)4 노량록(露梁錄),

정각(正覺)의 시권(詩卷) 앞머리에 쓰다[題正覺詩卷]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이자 문장가였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정각(正覺)이란 승려에게 써서 준 시다.

그가 평해에 정배된 해는 일본의 침략 전쟁이 발발했던 1592년 임진년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이산해의 연보에 따르면 그는 62세였던 1600(선조33) 이후 은퇴하여

여러 곳을 옮겨다녔는데, 1607(69)에는 노량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한적한 은거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문집의 체재나 연보의 기록 등 위와 같은 각종 정황을 종합해 보면,

이 시는 이산해의 최말년기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에서 자신을 백발의 늙은 거사라 칭했고,

원고본 말미에 아계노인이라 써있는 점도 시작(詩作)의 시간적 배경을 짐작케 한다.

 

시는 담담하고 평이하다.

첫 수는 여러 유명한 은자의 고사를 원용한 시구를 구사하며

여유롭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은거 생활을 그렸고,

둘째 수는 승려인 정각이 찾아와 시를 요청한 사연을 직서(直敍)하고

남에게 보일 것 없는 시를 되는대로 써 주노라고 말했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공신 봉호까지 받은 고관이었던 신분의 이가

승려의 청에 응하여 준 것이어서 색다른 수사나 심오한 주제 없이 편안하게 썼다.

다만 이산해의 시를 두고 후대에 회화성이 높다 평가한 예가 종종 있는데,

노량진 백사장 앞을 흐르는 맑은 한강에 비친 북한산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정다운 모습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보듯 그려낸 첫 수 마지막 연의 솜씨에서

과연 그러한 평가가 나올만했음을 수긍케 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문학적 가치를 논하기 힘든 평범한 시이다.

 

이 시의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원고의 글씨에 있다.

 

 

아계 이산해는 어린 시절부터 글씨로 이름이 났다.

대여섯 살 무렵부터 대자서(大字書)를 썼는데,

붓을 쥐고 뒤뚱거리며 써낸 커다란 글씨가 기운 넘치고 훌륭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구했다고 한다.

글씨 신동 이산해의 일화는 사위였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쓴 묘지명이나

후대에 채제공이 지은 신도비 뿐 아니라,

거의 당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어숙권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 그의 글씨가 꽤나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글씨는 남아있지 않으나, 중년 이후에 쓴 큰 글씨의 편액이

몇몇 남아 전하고 있어서 그 서풍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조광조 신도비등 묘도문자 글씨도 찾아볼 수 있다.

 

편액이나 묘갈문 등 어느 정도 법식을 갖출 필요가 있는 글씨에서

쓴 사람의 개성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이산해 특유의 맛이 잘 드러나는 글씨는 주로 행초서다.

 

이산해의 행초서는 변화무쌍하고 자유롭다. 또한 활달하며 기운이 넘친다.

보는 이마저 활발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저 글씨의 멋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두 기본 자료이다.

채제공의 이산해 신도비에는, 아버지(이지번)가 벽에 붙여두었던

황고산(黃孤山)의 초서를 유모의 품에 안겨있던 이산해가 좋아하며

손가락으로 획을 그어 더럽혔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황고산은 황기로(黃耆老, 1521~1575?)를 가리킨다.

고산 황기로는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초서 서가(書家)이다.

이들은 빠른 운필로 서사(書寫)한 변화미 넘치는 짜임새의 초서를 구사했는데,

이들의 자유분방한 초서는 일세를 풍미했으며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산해의 행초서 또한 이들의 서풍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생몰년 및 활동 기간으로 볼 때,

황기로의 글씨를 이산해가 배웠다기보다 황기로 등 선배 초서 대가들과

동시대의 서풍을 함께 호흡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글쓴이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원전정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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