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황혼시 모음 10

甘冥堂 2024. 6. 10. 10:26

황 혼 / 이인호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이 마음과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 두리번
찾아 봅니다.

앞 길이 뒷 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 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보다
아름답다는 해넘이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황혼(黃昏)에 관한 시(詩)모음 9選

​(1)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 용혜원

​젊은 날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아침에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도
소리치고 싶도록 멋이 있지만

저녁에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지는 태양의 빛깔도
가슴에 품고만 싶습니다.
인생의 황혼도 더 붉게
붉게 타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까지
오랜 세월 하나가 되어
황혼까지 동행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2)황혼 / 이육사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마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할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에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 네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져간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3)황혼 일기 / 고정희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에,
나는 차분하지 못하여
그 집의 너른 유리창가에 앉으면
바람부는 창밖은 딴 세상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잔조롭게 흔들리는 산목련 줄기 사이로
획 가로지르는 새도 새려니와
불그레 불그레 물드는
찔레꽃 이파리를 무심히 바라다보면
울컥하고 치미는 눈물 또한 어쩌지 못했다

후르르후르르 산목련 줄기에서 흔들리는 건
산목련잎이 아니라 외줄기 내 영혼이었기
기댈 곳 그리운 내 정신이었기
오래오래 나는 울었다

어둠이 완전히 창을 지워버렸을 땐
넋장이 무너지듯 내 이름도 깊어져
하염없는 슬픔으로 어깨기침을 했다

누군들 왜 모르랴
어두워지는 건 밤이 아니라
속수무책의 한 생애
무방비 상태의 우리 희망이거니
그 집의 주인은 조용히 다가와
너른 창에 커튼을 내리고
내 좁은 어깨를 따뜻이 감쌌다

(새도 날기 위해 날개를 접는 거란다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말야!)

문득, 신경통에 좋다는 골담초 꽃멍울이
건들건들 흔들리는 고향집이 그리웠다



(4)황혼 / 이대흠

노인은 쑤세미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쇠스랑 짚으며 마을 쪽으로 향한다

그림자가 세상 끝에 닿는다
바지게엔 어린 모가 가득하다

먼 데서 황소 울음이
노인의 허리처럼 구부러져 들려온다



(5)황혼에 보듬는 행복 / 란지 그리움

외로움으로 창살에 기대고
번민할때
소리 없이 다가와

따뜻한 손으로 뒤에서
어깨를 살포시 보듬는
그대 가슴 가득 장미 빛 물들고

새벽이슬 내린 파란 잔디에
길가에 피어난 들꽃
기쁨 전하는 사랑이 있다

미소로 그리움 그려 새기고
살며시 손 잡으면서
가슴에 하루에도 몇 번 씩

장미 빛으로 물들여 주는
그대가 있어
늘 하루가 행복합니다

그대 향해 곱고 아름답게
행복으로 채우고
장미 빛 꿈을 한 아름 안은

황혼에 보듬는 행복
그대를 만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6)황혼 / 김점용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은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 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하루는 멀쩡한 우리 집을 숨겼다가
경찰차를 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머리카락과 옷을 가위 속에
가스렌지 속에 숨겼다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7)황혼의 회안

감사하게 받은 생이기에
내가 스스로 가야할 길이라 생각하며
이왕이면 예쁘게 단장한
황홀한 꿈을 안고서

가시밭길 포도(鋪道)로 알고
숙명처럼 걸었더니

어린 시절 화려한 꿈은
무정한 세월의 몫에
다 빼앗겨 버리고

황혼을 눈앞에 두고서야
솔바람이 가슴으로 전해 주는
가을 소식에
문득 챙겨보니

쓴맛 단맛
어디 가고
희로애락의 자국만
업장의 여운으로 남았을 뿐
무심한 공허만이
내 삶의 동반자 되었네


(8)황혼 / 윤동주

​햇살은 미다지 틈으로
길죽한 一字를 쓰고, 지우고

까마귀 떼 집웅 우으로
둘둘 셋넷
작고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9)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 김준엽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 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에게 순종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백- 술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고  (1) 2024.06.12
10대 청소년의 유행어  (0) 2024.06.11
街談巷說  (1) 2024.06.09
손주에게  (0) 2024.06.09
윤보영시인의 별 시 모음  (1) 2024.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