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그리운 바다 성산포

甘冥堂 2025. 12. 20. 02:29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은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벌레 먹은 나뭇잎은 벌레를 먹은 나뭇잎이 아니다.

개구리 먹은 뱀은 개구리를 먹은 뱀이지만.

벌레 먹은 나뭇잎은 벌레에게 먹힌 나뭇잎이다.

다시 말하자면 벌레가 먹은 나뭇잎이다.

아니다, 벌레 먹은 나뭇잎은 벌레를 먹은 나뭇잎일 수도 있다.

벌레에게 하늘을 열어주느라 손바닥에 구멍이 숭숭 났지만,

날개를 얻은 벌레는 열흘 생애 동안 숲의 미래를 열다 죽어갔을 것이다.

먹는 게 먹히는 거고 먹히는 게 먹는 것일 수도 있다.<시인 반칠환>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시인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을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은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에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로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60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성산포 바다는 시인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늘 마음속에서 되돌아가고 싶은 근원의 자리,

영혼의 항구로 그려집니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발표해 성산포 바다를 시의 공간으로 승화시킨

이생진 시인

 

고인은 1929년 음력 221, 충남 서산에서 출생했고, 거기에서 성장했다.

현대문학을 통해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바다와 섬과 등대를 사랑해 섬을 떠돌며 섬사람의 애환을 시에 담았다.

섬에서 돌아오면 인사동에 사람을 불러 모아 섬을 주제로 시낭송과 담론을 폈다.

 

고인은 1955년 시집 산토끼를 시작으로 그리운 바다 성산포, 그 사람 내게로 오네,

우이도로 가야지, 실미도, 꿩 우는 소리, 골뱅이@이야기, 어머니의 숨비소리,

섬 사람들, 골맹도, 무연고, 나도 피카소처럼등 섬을 주제로 많은 시집을 발표했다.

 

제주도와는 시집그리운 바다 성산포(신도출판사, 1978)를 통해 깊은 인연을 맺었다.

시집은 총 바다를 본다에서 바다에서 돌아오면까지 총 81편의 작품을 실었다.

시인은 후기에 1~24편 까지는 1975년 여름에, 25~81편까지는 1978년 초봄에

성산포에서 바다를 보며 정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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