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병마용의 비밀
始皇帝(BC 259~210)는 자기가 직접 三皇五帝에서 명칭을 따서 皇帝라 하였고 스스로 짐(朕)이라 불렀다.
그는 진나라의 정통성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포악한 군주라는 등의 왜곡된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과 끝을 살피지 않고 그 잘한 바를 칭찬하지 않으니 귀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서글프다 할 수 있다 라는 소위 耳食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兵馬俑坑은 서안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동지역에 있으며 진시황 능은 병마용 갱으로 부터 1.5KM 떨어져 있다. 병마용 갱에는 실물모형으로 170~190cm 크기의 8천개의 무사들의 俑(인형)과 무기 십만 건이 발굴되어 있다. 1호 갱이 제일 큰데 여기에는 보병 위주의 군인들이, 2호 갱에는 기병과 보병이, 3호 갱에는 사령부가 있으며, 4호 갱은 발굴이 중단된 상태다.
이들 군사들의 모습은 모두 길게 뻗친 수엽과 잘 다듬은 머리가 그 특색이다.
진나라는 6국을 통일했다. 진은 원래 야만족이었는데 이들이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배경은 무엇일까. 왜 군인들은 상대를 압도하는 듯한 눈에 수염을 길렀으며 투구도 안 쓰고 머리를 잘 다듬었을까? 진나라 군대의 힘은 머리카락과 수염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군인은 사기를 먹고 산다. 사기는 군기에서 나온다. 군기는 복장으로 잡는다. 이들의 수염과 머리가 곧 복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당시에는 두발을 존중하는 제도가 있었다.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다치게 하면 그는 墨刑이라는, 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써 넣는 무서운 형벌을 받았다. 수염은 그 사람의 기품을 나타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복장은 간편하게 입었고 투구도 없으니 몸이 가벼워 기동성이 있어 일당백의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수염과 머리가 곧 진나라 군대를 강하게 만든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의 능원 전체의 면적은 약 70만 평이다. 서울대 관악캠퍼스가 약 100만평이니 그 무덤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은 13세에 즉위 하자마자 무덤의 축조를 시작했다. 49세에 사망하였으니 36년간 재위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2세 황제 때에 가서야 완성하였다. 왕의 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신도시를 만들어야 했다. 각종 장인 노동력 물자유통 및 제작을 위해, 또 그들이 소비하고 생활을 해야 하기에 시장도 있어야 했다. 사기 본기에는 죄수 70만 명을 동원하여 여산에 왕릉 공사를 벌였으며, 깊이는 우물 3개 깊이로 하였고, 모형으로 궁궐을 짓고 문무백관과 각종 기물을 만들었으며, 棺을 둘러싸고 있는 곽까지 銅을 끓인 쇳물을 흘려 부었다.
또 水銀을 하천과 강과 바다의 모형에 흘려서 부었다. 수은은 진공상태에서만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데 , 강과 하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진공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 천정에는 별자리를 만들고 바닥에는 천하의 형세를 만들었으며. 무덤내의 조명으로는 人魚기름을 사용하였는데 인어기름은 학자들의 추측으로는 고래 기름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당시에는 왕이 죽으면 시집을 가지 못한 궁녀는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진시황은 그 여인들을 함께 순장시켰다. 또 마지막으로 무덤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기술자들을 무덤 안에 가두고 돌문을 막아 못나오게 하였다.
1982년도에 수은에 주목하여 수은을 측정하였다. 무덤의 수은 함유량을 조사한 결과 무덤이 있는 한 가운데의 수은량이 일반 흙의 100배로 나타났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90배, 80배, 70배...로 나타났다. 이 결과를 토대로 하여 진시황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處女墳으로 밝혀졌다.
또 진시황의 무덤은 획기적이었다. 그 이전의 무덤은 그냥 시신을 평지에 묻고 봉분이 없었으나 진시황의 무덤은 봉분을 산처럼 크게 만들었다. 무덤으로 산을 만들었다는 以陵爲山이다. 이것이 당나라에 와서는 산을 무덤으로 만들어 어디가 입구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소위 以山爲陵이 된 것이다.
규모와 깊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무덤의 한 변이 500m 이며 地下宮은 동서가 260m, 남북이 120m 이며 지하궁에는 3개의 문이 있고 그중 가운데 문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 닫히는 문이다. 지하궁으로 통하는 문은 3개가 발견되었고 우물 3개의 깊이는 30m로 십층 빌딩의 규모로 밝혀졌다. 또 누군가가 침입하면 화살이 발사되게 설계되어있다고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제일 궁금한 것이 시체가 어떤 상태로 있느냐이다.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에서 귀부인의 시체가 2000년 만에 발견되었는데 미이라 형태로 오장육부가 완전하고 피부도 손가락으로 누르면 쏙 들어갈 정도로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완전 진공상태여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진시황의 시체는 어떨까? 銅을 녹인 쇳물과 水銀 등으로 완전 진공상태이니 거의 완전한 미이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오산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진시황이 동부를 순시 중 죽은 때가 음력 7월이니 날씨가 더웠을 것이고 河北에서 장안까지 이동하는데 한 달은 걸렸을 테니 시체가 온전할 리가 없다. 史記에, 운반 중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이를 감추려고 생선을 같이 실어 생선이 썩는 것처럼 냄새를 피웠다고 한다. 그러하니 아마 시신은 거의 부패되었을 게 분명한 것이다.
西安의 인동지역에 있는 병마용의 문화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1974년 발견되어 발굴 작업 끝에 1979.10.1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일본의 NHK가 1980년 4월 전 세계에 방송했다.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관람객수가 일 년에 220~230만 명이 되고 1년 수입이 2500억(2000년 통계)에 이른다. 이처럼 문화의 부가가치란 막대한 것이다. 다른 일례로 중국 안휘성에 있는 九華山은 우리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중국 4대 보살 중 지장보살을 모시는 절이 있어 유명하다. 여기의 지장보살은 신라의 왕자 金喬覺 스님이 化身하신 것으로 이 절 하나로 40만 인구가 먹고 산다고 한다. 그만큼 문화재의 부가가치는 막대한 것이다.
진시황릉 발굴과 관련된 웃기는 얘기도 있다. 일본의 다나까 수상과 중국의 주은래와의 회담에서 일본 수상이 제안을 했다. 진시황 무덤 발굴자금을 모두 댈 테니 거기서 나오는 유물을 반반씩 나누자. 이 말을 들은 주은래가 답했다. 여기서 나온 유물로 너의 나라를 사고도 남을 텐데 왜 발굴을 하느냐?
또 등소평과 일본 수상이 회담을 했다. 일본수상이 자랑했다. 일본에는 신칸센이 있어 몇 시간 안에 어디든 갈수 있다고 자랑하자, 등소평이 말했다. 너희 나라에 그게 뭐가 필요하냐? 일본의 땅덩이가 중국의 그것에 비해 매우 작음을 빗댄 것이다. 이런 우스개는 다분히 중국인들의 허풍이 만들어 낸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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