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로부터 배우는 인간학-秦始皇
진시황은 성은 嬴씨요 이름은 정이다. 그의 부친은 子楚다. 자초는 趙나라에 인질로 묶여있었다. 당시 조나라의 呂不韋라는 부자 장사꾼이 있었다. 여불위는 자초의 사람됨을 보고 그를 위해 투자하기로 맘을 먹었다. 戰國策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농사를 잘 지으면 10배의 이익이 날 수 있다. 귀한 물건을 잘 유통시키면 100배의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투자를 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 여불위는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자초가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을 정도의 품위 유지비를 지원하였다. 이에 더하여 그가 아끼는 첩 趙姬까지도 아낌없이 바쳤다. 이 조희라는 여인은 여불위의 아기를 밴 상태에서 자초에게 시집을 가서 애기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嬴정. 훗날 진시황인 것이다.
자초는 인질에서 풀려나 진나라의 왕이 되었으나 불과 3년 만에 죽고 말았다. 당시 13세였던 영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나이가 어리니 여불위가 섭정을 했다. 여불위의 말대로 사람에게 투자하여 나라를 얻은 것이다. 당시 여불위는 식객이 3천명이나 되었고 권세가 천하를 눌렀다. 진왕의 나이 21세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태후인 어머니 조희가 여불위와 간통을 하였다. 옛정이 생각났던 것이다. 여불위는 이를 피하려 노애라는 자를 조희에게 소개했다. 노애는 생식기로 마차를 끌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태후는 이 노애를 사랑하여 두 사람 사이에 두 명의 자식까지 생겼다. 이를 알게 된 진왕이 노하여 노애의 삼족을 멸하였다. 22세 때는 여불위를 파면하여 친정체제를 만들었다.
32세 때에는 자객 荊軻에 의한 암살미수 사건이 있었다. 형가는 지도에다가 단도를 둘둘 말아 진왕에게 바치는 척 하다가 단도를 뽑아 찌르려 했다.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단도로 찔렀으나 소매는 길고 칼날은 짧았다. 이때 어의가 약통을 형가에게 던지는 바람에 그 틈을 타 진왕은 장검을 뽑아 형가의 다리를 찔렀다. 형가는 쓰러진 중에도 진왕을 향해 칼을 던졌으나 그만 기둥에 박히고야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진나라가 경색되기 시작한 것이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38세 때인 BC 221년 드디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했다. 천하를 통일한 후 진왕은 스스로 삼황오제를 빌어 황제라 칭했고, 그것도 처음 천하를 통일하였다하여 始皇이라 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朕(짐)이라 했다.
진시황은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마차 바퀴를 통일하고 고속도로를 만들고 가로수도 심었다. 또 고속도로에 마차 바퀴를 넣어 달릴 수 있게 요즈음의 레일 개념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진시황은 40세 때 태산에 제사를 지냈다. 봉선의식이다. 이후부터 중국의 황제들은 즉위하면 봉선제를 지내게 되었다.
41세에 또 암살기도가 있었다. 서안 三傑 중 한 사람인 장량의 사주를 받은 청해力士가 120근이나 되는 철퇴를 휘둘러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만 진시황의 바로 앞에 가던 마차를 부수는데 그쳤다. 장량은 한신, 소하와 더불어 漢제국를 일으킨 공신들이며, 당시에 장량은 자기 조국을 멸망시킨 원수를 갚고자 암살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44세 때부터 진시황은 불노장생을 시도했다. 이때부터 그의 몸에 이상이 오지 않았을까 추측이 된다. 그는 통일제국을 어떻게 유지할까?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제국을 유지할까? 가능하면 오래 살아야겠다. 이 부분에 대해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진시황은 하루의 할 일의 양을 정해놓고, 그 일을 끝내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았다. 소위 일 중독이며 스트레스 과로였던 것이다. 47세에 아방궁을 지었으며 지붕 없는 터널을 만들고, 궁궐과 궁궐사이에 구름다리로 연결하였다.
49세 되던 해 동쪽지방을 순시하던 중 沙丘에서 쓰러졌다. 변방을 지키던 태자 부조를 급히 오라 조서를 내렸으나 사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만 죽고 말았다. 이를 틈타 환관 조고가 유서를 조작하여 둘째 왕자인 胡亥로 하여금 2세 황제가 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역사가 끝난 것이다.
진시황은 어떻게 생겼나.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매부리코에 길게 찢어진 눈. 새가슴에 승냥이 같은 목소리를 가진 보기에 못생긴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190cm가 되는 위풍당당한 대장부라는 주장도 있다. 승냥이 같은 쉰 목소리는 아마 기관지염을 앓지 않았나 하고 곽말약 같은 사람은 추측한다. 그러나 알 수가 없다. 무덤을 발굴하여 그의 영정이 나온다면 가능할까?
그러나 중국에서는 무덤을 발굴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한다. 중국 수상이었던 周恩來는 후손에게 미루어야 한다. 지금 우리 기술로는 발굴할 수 없다. 이미 병마용의 원래 색깔도 잃어버렸는데 함부로 손댈 수 없다고 발굴에 반대했다. 한 사람의 깨어있는 정치가의 의식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된 것이다.
<이 글은 EBS 김영수의 사기 강연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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