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원효대사의 무애가

甘冥堂 2019. 11. 15. 08:28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어떤 것이든 막힘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


원효대사의 무애가(無碍歌)다.


원효(617-686)는 신라 진평왕 39년에 출생하여 신문왕 8년에 작고한 신라의 승려로서

아명은 서당, 집에서 보통 불려는 이름은 신당이다.

그의 어머님 꿈에 하늘 유성이 품으로 들어왔는데 그 이후 태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분만할 때 하늘에 오색구름이 주변 땅을 덮었다. 그날이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이였다.

원효는 상당히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으며 일정한 스승 없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 갔다.

 

원효는 중국유학은 못 갔지만 그의 행장은 당승 전에 상세히 기록된 전기가 있다.

 

원효는 낮이나 밤이나 어느 곳에서나 차()를 즐겨 마신다.

아침 일찍부터 공연하는 배우처럼 거리에서 춤을 추며 허리에 차고 있는 바가지를 치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줄 사람이 없느냐

내 손으로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 노래를 들었던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듣고 말하기를

아마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아들을 낳겠다고 하는 것 같다.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이익 될 것이다하였다

그때 과부가 된 누이동생이 요석궁에 홀로 살고 있었으므로 궁의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서 궁으로 모셔오게 하니

관리들은 명을 받고 원효를 찾으러 갔는데,

원효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일명 유교)를 지나다가 그들과 만나자 일부러 냇물에 들어가서 옷을 적시었다

 

관리들은 원효를 요석궁으로 모시여 젖은 옷을 갈아 입혔다. 그리고 그날 하룻밤을 요석궁에서 자게 한다.

그후 요석공주는 임신하여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서부터 총명하여 경사에 박통하여 훗날 신라 10현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

 그는 우리 언어로 중국과 풍속 문물이 통하게 하였던 일명 이두문자(吏讀文字)를 만들었다.

육경(六經) 문학을 해석하기 위하여 지금도 한문을 배우는 사람에게 전수되어 이어지고 있다

 

원효는 설총(薛聰)을 낳은 뒤부터 파계하여 속인의 옷차림을 하였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였다.

때로는 배우같이 춤을 추었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바가지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이상하였다.

원효는 그 모양에 따라 도구(道具)를 만들어

<어떤 것이든 막힘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무애가(無碍歌)를 지어서 부르고 다녔다.

 

화엄경 구절에서 따온 이 노래는 원효의 생각과 삶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원효는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고 걸인들과도 어울렸으며, 밥 먹다가 느닷없이 밥상을 걷어차고 나가서 설법을 하기도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는 그러한 규제가 전혀 없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마을사람들이 노래를 불렀으며 춤을 추어 세상에 알렸다.

불타의 이름을 알리고 남무(南無)의 호칭을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원효의 공이였다

 

원효가 탄생한 마을을 불지촌(佛地村). 개원한 절을 초계사(初開寺),

자칭 원효(元曉)라 한 것은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다.

원효라는 뜻은 당시 사람들이 <새. 해가 돋는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금강경소(金剛經䟽)을 지었는데 그 외에

金剛三昧經論, 起信論別記, 大乘起信論疏. 華嚴經宗要 등의 저술이 있다.

원효는 우리들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눔하고 현 위치의 단계를 초지(初地)라 말하였고,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는데 이를 각성 혹은 불법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 참고) 출처:경남연합신문 다향만리(茶香萬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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