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한 잎의 여자 1 2 3

甘冥堂 2022. 2. 22. 10:32
한 잎의 여자 1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 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여자,
남대문 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날엔 팬티 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한 잎의 여자 3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여자, 그레뉼 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
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 같은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여자,
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 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 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

물푸레 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오규원 시인의 삶
1941년 경남 삼랑진 산.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처음으로 추천돼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돼 등단했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 언어의 리듬을 통한 이미지 재현,
광고이미지를 비튼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보이면서
전통적인 시 작법에서 탈피하여 개성 강한 시세계를 보여왔다.

20여년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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