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노인들의 불문율

甘冥堂 2024. 4. 8. 11:00

죽은 소설가가 말을 걸었다
의식 있는 노인들의 불문율은 아픔과 고통에 대해 입을 닫는 것이었다.

서가를 정리하다가 소설가 최인호씨가 수덕사에 묵으면서 쓴 에세이집을 발견했다.
그가 죽기 몇 년 전 쓴 글 같았다.
아마도 암이 발견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투병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곧 닥쳐올 노년기에 내가 심술궂은 늙은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는 것이 내 소망이다.
무엇에나 올바른 소리 하나쯤 해야 한다고 나서는 그런 주책없는 늙은이,
위로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체의 고통을 호소하는
그런 늙은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 더 바란다면
전혀 변치 않는 진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죽는 날까지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는 지금은 땅 속에서 한 줌의 흙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글이 되어 지금도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가 죽은 날 신문에 난 사진이 아직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서글픈 얼굴이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었다.
청년으로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희랍인 조르바같이 항상 기뻐하고 춤을 추고 떠들 것 같았다.
그런 그가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침묵을 말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진리란 그런 게 아닐까.
  
지난 이년 동안 실버타운에 묵으면서 노인들의 지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혼자 조용히 밥을 먹고 상을 닦고 의자를 제자리에 놓은 채 말없이 사라지곤 했다.
내 나이 또래의 다정한 교장선생님 부부의 모습이었다.
  
 밀차를 잡고 간신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노인을 봤다.
혼자 고통을 참을 뿐 아픔을 얘기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다 성공해서 잘 산다고 하는데도 노인은 아들 얘기를 입에 담지 않는다. 젊어서 수십 년 잠수부로 깊은 바닷속에서 외롭게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다는 노인이었다.

실버타운에 들어와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고독을 견뎌내는 노인도 있었다.
아들과 손자가 보고 싶지만 혼자서 참아내고 있는 것 같다.
실버타운의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그의 마음은 가족과 함께 있다.
그는 골프보다 손자의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줬으면 더 좋겠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비행기의 기장으로 승객을 태우고 지구의 하늘을 날았다고 했다. 깜깜한 밤 하늘을 보면서 상자 같은 조종실에 혼자 있을 때도 외로웠었다고 했다.
의식 있는 노인들의 불문율은 아픔과 고통에 대해 입을 닫는 것이었다.
세상 남의 일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며칠 전 실버타운 로비에서 칠십대 후반의 한 노인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하루 종일 몇 마디도 하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암 수술을 하고 요양을 와 있었다. 그는 대학 재학중에 고시에 합격을 하고 승승장구했던 고위공직자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꽤 분위기 있는 미남이었을 것 같다.
그 역시 삶의 마지막은 고독과 완만한 죽음이 지배하는 바닷가의 실버타운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품격있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밥과 물을 안 먹고 이십 일을 견디면 정확하게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할 결심인 것 같았다.
지혜로운 노인들은 품위 있게 죽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구십대의 한 노인은 실버타운은
무의식의 먼 나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잠시 스치는 대합실이라고 했다.
서로서로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길을 왔는지 서로 말하지 않는다.
눈인사 정도를 할 뿐 자기 자리에 말없이 앉았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조용히 영원한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했다.
  
나는 인생이라는 소설의 결론 부분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시들듯 사람도 늙고 병들어 죽는다.
젊은 날의 성취와 실패 웃음과 고민은 시시각각 변하는 스크린을 스치는 장면들이 아니었을까.
내 몸은 나의 영혼이 이 세상을 타고 지나가는 자동차가 아니었을까.
  
인생의 결론 부분에 와서 젊은 날을 돌이켜 본다.
그때의 고민들이 정말 그렇게 심각한 것이었을까.
젊음과 건강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이었는지를 몰랐다.
늙어보니까 젊은 날 추구하던 돈과 명예 지위가 다 헛되고 헛되다.
퇴근을 하고 저녁에 아들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가 나누어 먹으면서 활짝 웃을 때가 행복이었다.
  
엄상익(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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