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수선화에게

甘冥堂 2024. 6. 21. 17:22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아스파라거스목에 수선화과에 속하는 식물.

학명은 Narcissus tazetta var. chinensis Roem.이다.
수선화의 속명인 나르키수스 (Narcissus)는
그리스어의 옛 말인 'narkau'(최면성)에서 유래된 말이며,
또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물속에 빠져 죽은 그 자리에 핀 꽃이라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수선이라는 말은 성장에 많은 물이 필요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물에 사는 신선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꽃말은 '자존'이고 꽃은 필 때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하다.


시인은 그리스 신화의 수선화 이야기를 차용하여
짝사랑의 고통과 외로움을 인간 조건의 보편적인 측면으로 확장한다.

수선화 신화에서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너무 홀려 결국 물에 빠져 죽는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자기애를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로 사용된다.
정호승의 시에서 수선화는 짝사랑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사랑이 짝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인은 마치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슬픔에 빠져들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슬픔을 극복하고 외로움을 인간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하느님조차도 외로움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외로움은 개인적인 실패나 결함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 궁극의 조건일 뿐이다.

시인은 외로움을 슬픔이 아닌 인간성의 증거로 본다.
외로움은 우리가 서로와, 그리고 더 큰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러한 연결성은 우리를 외로움에서 구해주는 위안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한편 수선화는 추사 김정희가 좋아했던 꽃인데
제주로 유배를 갔을 때
육지에서 귀한 수선화가 제주도에선 소도 안 먹는 악명높은 잡초로 널려있는 것을 보고
귀한 것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천대받는다며 놀랐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제주도에 갇혀버린 자신의 처지를 보는 듯해서 더욱 씁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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