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이 시를 표제로 내세워 19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시집에 발문을 썼던 평론가 임우기는
"정수리로 내려치는 우레 같은 시"라고 했다. 과연 깊고 떨리는 시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어떤가 몸이여"라고 가만히 물었을 때
그 직접적인 대상은 서울역 지하도나 남산 자락의 노숙인들이 아니었다.
물음의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의 몸이었다.
1977년 서울대 국문과 학생이었던 그는 이른바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걸려 첫 번째 징역을 살았다.
서슬 퍼런 유신 치하에서 긴급조치 위반은 곧바로 빨갱이 취급을 당하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이후 다시 1980년 '서울의 봄'에 잠시 해방감을 맛보았지만 이내 광주항쟁이 터졌고
그는 다시 요주의인물로 수배대상이 되었다가 이듬해 잡혀 들어갔다.
고난의 시절은 계속 이어졌다. 1989년 다시 투옥됐다가 나온 뒤로는 도피의 세월을 살았다.
두 딸과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객지를 잠행으로 떠돈 게 2년 세월이었다.
이 무렵 그 시 '노숙'이 나왔다.
거울 / 김사인
겁에 질린 한 사내 있네
머리칼은 다복솔 같고 수염자국 초라하네
위태롭게 다문 입술 보네
쫓겨온 저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
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 보네
손을 내밀까 악수를 하자고
오호, 악수라도 하자고
그냥 이대로 스치는 게 좋겠네
무서운 얼굴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겁에 질려 쫓겨온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동일 인물이다.
느린 말투에다 무방비 상태의 너털거리는 순한 웃음을 자주 웃는 그이에게서
'투사'의 이미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이가 지나온 저 고난의 연대, 그 20여년 세월을 들어보니 짐작이 맞았다.
그는 천생 갈 데 없는 촌사람이었고, 그 연대를 통과하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깊은 서정의 울림을 전할 수 있는 힘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