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두봉(釵頭鳳) - 육유(陸游)
紅酬手 黃藤酒 (홍수수 황등주)
滿城春色宮牆柳 (만성춘색궁장유)
東風惡 歡情薄 (동풍악 환정박)
一懷愁緖 幾年離索 (일회추서 기년이색)
錯 錯 錯 (착 착 착)
春如舊 人空瘦 (춘여구 인공수)
淚痕紅浥鮫綃透 (저흔홍읍교초투)
桃花落 閑池閣 (도화락 한지각)
山盟雖在 錦書難託 (산맹수재 금서난탁)
莫 莫 莫 (막 막 막)
붉고 매끄러운 손으로 황등주를 따라주었네
성에는 봄빛이 가득 차고 궁궐 담장엔 버들잎
봄바람이 나빴던가 사랑이 옅었던가
한번 품은 근심의 실마리 몇 년이나 헤어져 헤맸던가
아! 잘못되었네, 잘못되었네, 잘못되었네!
봄은 예나 지금이나 의구하지만 사람만 홀로 야위어
연지 바른 얼굴에 흐르는 붉은 눈물 손수건을 적시네.
도화꽃 떨어지고, 연못가의 누각 또한 한가로운데
굳은 맹세 있다 한들 비단 글로도 전하기 어렵구나.
끝이로다, 끝이로다, 끝이로다!
심원(沈園)은 육유(陸游)와 당완(唐琬)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공간이었다.
버들가지가 궁궐 벽에 드리워진 봄날
당완(唐琬)은 연분홍 고운 손으로 육유(陸游)에게 황등주(黃藤酒)를 따라 주었다.
그때는 내 아내였는데 이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황등주(黃藤酒)를 선물하고 있다.
그 술에 취한 사내의 가슴이 얼마나 처참(悽慘)하게 찢겨나갔을까.
동풍(東風)은 그런 상황을 만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면서
당시 그녀의 뜻에 반항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미움이겠다.
그런 자신의 마음처럼 당완(唐琬) 역시 초췌해진 모습이다.
괜스레(空) 말라버렸다는 것은 그녀를 지켜주기 위함이다.
차마 외간남자가 되어버린 자신 때문에 그랬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이제 두 사람은 그리워해서도 안 될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들고 있던 손수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돌아서 눈물을 닦을 때 연지가 묻은 것이리라.
그녀가 시집올 때 주었던 맹세(盟誓)의 징표(徵表) 채두봉(釵頭鳳)이 그리워라.
그리하여 육유(陸游)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먹물로 삼아
심원(沈園)의 담벼락에 뿌려놓은 것이다.
그러곤 그녀를 잊기 위해, 그녀의 자태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관리가 되어 천촉(川蜀)의 전장(戰場)으로 달려갔다.
1년 후 다시 심원(沈園)에 온 당완(唐琬)은 육유(陸游)와 만났던 자리를 찾았다가
그가 써놓은 글을 발견했다.
심장이 멎은 듯 충격에 휩싸인 그녀는
처연(凄然)한 마음으로 육유(陸游)의 눈물에 화답(和答)했다.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마냥 미소 지어야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채두봉(釵頭鳳)-당완(唐琬)
世情薄人情惡 (세정박인정악)
雨送黃昏花易落 (우송황혼화이락)
曉風乾淚痕殘 (효풍건누흔잔)
欲箋心事獨語斜欄 (욕전심사독어사란)
難 難 難 (난 난 난)
박정한 세상 모진 인정에
비 뿌리는 황혼녘 꽃조차 쉬이 지네.
새벽바람 불어와 눈물 자국 마르고
이 마음 적으려다가 난간에 기대어 혼잣말로 마네.
아아! 어렵고도 어려워라.
人成各今非昨 (인성각금비작)
病魂常似秋千索 (병혼상사추천삭)
角聲寒夜闌珊 (각성한야란산)
怕人尋問咽淚裝歡 (파인심문인루장환)
瞞 瞞 瞞 (만 만 만)
그대와 헤어진 지금은 어제가 아니니
오랜 번민은 세월의 끈과 같아라.
뿔피리 소리, 추운 밤이 끝나 가는데
사람들 물을까 두려워 눈물 삼키며 즐거운 양 하였네.
아아! 이 모두가 거짓이어라.
각성(角聲) : 군중(軍中)에서 쓰던 나발 비슷한 각을 부는 소리.
오음의 하나이니, 빠르고도 맑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도 반갑게 손잡을 수도 없는 현실의 애절함이
당완(唐琬)의 ‘채두봉(釵頭鳳)’에 절절이 담겨있다.
청춘(靑春)은 시들어가니 황혼녘이요,
젊음과 아름다움은 꽃처럼 떨어진다.
서글픈 심사(心思)를 글로 써서 보내고 싶지만 그저 난간(欄干)에 기대어 그리워할 뿐.
그처럼 세상사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어렵구나 어렵구나를 마냥 되뇐다.
한때의 부부(夫婦)는 헤어져 남남이 되었고,
서로 반려(伴侶)를 얻었으니 다시 합치기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은 미로(迷路)를 헤매는 것처럼 아득하다.
새벽녘 야경꾼의 호각소리 들릴 때까지 잠 못 이룬다.
날이 밝아 누군가 찾아와 안부를 물으면 억지로 미소 지을 수밖에.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 보면 속병이 나게 마련이지요.)
당완(唐琬)은 그렇듯 육유(陸游)의 채두봉(釵頭鳳)에 화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 애절한 최후를 알 리 없는 육유(陸游)는 변방의 군영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녀를 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마음은 하나이나 몸은 떨어져 시름에 겨워 늙어만 갔고,
반평생의 고독감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와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 육유(陸游)는
심원의 담벼락에서 자신의 시 ‘채두봉(釵頭鳳)’ 아래 씌어있는 당완(唐琬)의 답시(答詩)를 보고
새삼 처량(凄涼)한 심정이 되었다.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리움에 병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뒤 75세의 육유(陸游)는 다시 심원(沈園)을 찾았다.
세월이 흘러 심원(沈園)은 옛 모습을 잃었고 담장에 써놓았던 시(詩)도 희미해졌다.
과거 당완(唐琬)을 만났던 다리를 밟으며
젊은 시절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 당완(唐琬)의 흔적을 더듬던 육유(陸游)는
서글픈 마음으로 다시 붓을 들어 ‘심원(沈園)’ 2수를 지었다.
애국시인 육유(陸游)의 세월
남송(南宋)의 시인(詩人) 육유(陸游)는 금(金)나라에 의해 연경(燕京)이 함락되고 나서
열흘 뒤인 1125년 10월 17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육재(陸宰)는 병참 보급을 담당하는 경서로전운부사(京西路轉運副使)였다.
그는 명성이 자자한 학자(學者) 겸 시인(詩人)으로 엄청난 책을 보유한 장서가(藏書家)였다.
어머니 당씨는 신종(神宗) 때 재상을 지낸 당개의 손녀였다.
당씨가 육유(陸游)를 수태했을 때 꿈속에서 송사(宋詞)의 대가인 진관(秦觀)을 보았다 하여
아들을 낳자 그의 자인 소유(少遊)를 따서 이름을 육유(陸遊)라 지었다.
육재(陸宰)는 전란(戰亂)이 심화되자
1백여 명의 식솔(食率)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 북쪽에 있는 산음(山陰)으로 내려왔다.
육유(陸游)는 그곳에서 책향기로 가득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도연명(陶淵明), 왕유(王維), 장삼 등의 시(詩)에 심취했고
한편으로 검술(劍術)을 익혀 대장부(大丈夫)의 기풍을 몸에 담았다.
아버지 육재(陸宰)는 동료들과 함께 잃어버린 북쪽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었지만
남송(南宋)의 황제 조구(趙構)와 재상 진회(秦檜)는 명장 악비(岳飛)를 죽이고 금(金)나라를 신하의 예로 섬겼다.
때문에 아버지를 비롯한 남송(南宋)의 지사들은 비분강개(悲憤慷慨)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육유(陸游)는 뜨거운 애국심을 키우며 자라났다.
사랑하는 여인 당완(唐琬)과의 행복도 잠시,
어머니의 강요로 이혼한 뒤 왕씨와 재혼한 육유(陸游)는
스물아홉에 쇄청시(鎖廳試)에 응시해 장원급제(壯元及第)했고,
이듬해 최종관리 선발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했지만
손자를 합격시키기 위한 진회(秦檜)의 방해로 인해 낙방(落榜)했다.
실망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시(詩)를 쓰고 병서(兵書)를 읽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육유(陸游)는 1158년 34세의 나이에 복주(福州) 영덕현(寧德縣) 주부(主簿)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161년 금(金)의 해릉왕(海陵王) 완안량(完顔亮)이 남침해오자
송(宋)나라 내부에서 중원 수복의 기치가 높이 드리워졌다.
1162년 육유(陸游)는 추밀원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각처의 전황을 보고받았다.
얼마 후 완안량(完顔亮)이 부하 완안옹(完顔雍)에게 죽는 등
내분을 겪으며 북쪽으로 철수하자 고토회복(故土回復)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우유부단(優柔不斷)한 황제의 태도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무렵 쓴 시 ‘객종성중래(客從城中來)’에는 오랑캐를 무찌를 생각은 하지 않고
쓸데없이 논전만 일삼는 조정 대신들에 대한 울분이 가득 담겨있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 주전파(主戰派)인 장준(張浚)을 우승상(右丞相) 겸 대도독(大都督)으로 기용해 북벌을 추진했다.
당시 육유(陸游)는 전략의 요지였던 진강(鎭江)의 통판(通判 지부(知府) 아래에서
세금으로 걷은 양곡을 운반하거나 농사일, 수리, 소송 등의 사무를 담당한 관직)이 되어 장준(張浚)을 보좌했다.
하지만 이듬해 황제가 금(金)과 화의(和議)를 체결하고 장준(張浚)을 파면하면서
북벌파(北伐派)인 육유(陸游)는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산음(山陰)으로 돌아온 그는
우연히 심원(沈園)에서 전처(前妻)인 당완(唐琬)과 해후하고
담벼락에 채두봉(釵頭鳳)을 적어 넣었다.
1170년 기주(夔州) 통판(通判)을 거쳐 섬서(陝西)의 최남단인 남정(南鄭)에 부임한 그는
사천(泗川)선무사(宣武祠) 왕정(王侹)의 막부(幕府)에서 조정에 북벌(北伐)을 건의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1172년 왕염(王炎)이 추밀원(樞密院)의 고위직에 임명되면서 막부(幕府)도 해산되자
육유(陸游)는 성도부로(成都府路) 안무사참의관(安撫司參議官)이 되어 성도로 부임했다.
평생의 꿈인 북벌이 무산되자 실망한 육유(陸游)는 성도(成都)에서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그 무렵 육유(陸游)는 시(詩)와 그림에 능한 여인 양씨를 만나 첩(妾)으로 삼았다.
그녀는 딸 하나를 낳았지만, 육유(陸游)가 엄주(嚴州)의 지주(知州)로 발령받아 떠나는 길에 죽고 말았다.
이후 강서(江西)와 엄주(嚴州)에서 지방관 생활을 하다가
65세 때 예부랑중(禮部郎中)이 되었을 때
자신이 쓴 시 1만 8천 수 중에 900 수를 선별해 시집 20권을 간행했다.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육유(陸游)는 자신의 서재를 노학암(老學庵)이라 불렀다.
당시 한 친구가 책 속에 묻혀 사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육유(陸游)는 거의 모든 생활을 서재에서 했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은 물론이고
몸이 아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서재를 떠나지 않았다.
앉았다 일어나기라도 할라치면 사방이 온통 책이라 발을 딛고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찾아온 손님이 그것을 보면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설사 들어가더라도 나올 수 없을 만큼 책이 많았다.
둘은 서로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1209년 12월 29일 육유(陸游)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저승에서 사랑하던 여인 당완(唐琬)을 만나
채두봉(釵頭鳳)을 다시 머리에 끼워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