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獄詠蟬 /낙빈왕
西陸蟬聲唱 (서륙선성창) 가을에 매미가 큰소리로 우니
南冠客思侵 (남관객사침) 이 죄인의 마음만 서글프다
那堪玄鬢影 (나감현빈영) 어찌 견디랴 머리 검은 저 매미
來對白頭吟 (래대백두음) 이같이 날아와 백발을 향해 노래하니
路重飛難進 (노중비난진) 이슬이 무거워 날아가기 힘들고
風多響易沈 (풍다향이침) 바람이 심해 소리마저 잦아드니
無人申高潔 (무인신고결) 고결한 마음 믿어줄 사람 없어
誰爲表予心 (수위표여심) 누구에게 내 마음 보여줄 수 있나
*西陸(서륙)- 가을을 뜻한다. 옛날 사람들은 해가 이곳을 지나면 가을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서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南冠客思侵(남관객사침)- 남관(南冠)은 원래 남방 초’나라 사람이 쓰는 관리는 뜻인데
초’나라 죄수를 지칭하거나 여기서는 죄수를 가리킨다
춘추좌전『노성공9년』조에 따르면 진(晉)나라 군주가 군대 감옥을 사찰하다가
종의(鍾儀)라는 초’나라 출신의 죄수를 보게 됐다.
종의는 고국을 잊지 못해 고집스럽게 초’나라 갓을 쓰고 있었다.
이를 보고는 그를 풀어주게 했다.
*那堪玄鬢影(나감현빈영)- 나감(那堪)은 ‘어찌 견디랴?의 뜻이다.
견딜 수 없다는 뜻이 ‘불감(不堪)’으로 된 판본도 있다.
현빈(玄?)은 검은 살쩍이라는 뜻으로 매미를 가리킨다.
검은 줄이 드문드문 나 있는 매미의 날개가
사람의 살쩍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來對白頭吟(래대백두음)- 백두(白頭)는 백발을 뜻하는 말로 낙빈왕 자신을 가리킨다.
옥에 갇혔을 때 그는 30대 후반이었다.
실의로 인해 노쇄해졌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露重飛難進(로중비난진)- 노중(露重)은 이슬이 무겁다는 뜻이다.
비난진(飛難進)은 작자가 너무 청렴해 승진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響易沉(향이침)- 울음소리가 쉽게 묻힌다는 뜻이다.
*誰爲表予心(수위표여심)- 위(爲)는 ‘-하다’의 의미이다.
표(表)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여심(予心)은 나의 결백한 마음을 가리킨다.
해설(解說)
이 시는 사물을 관찰한데 따른 감흥을 그린 영물시(詠物詩)에 속한다.
낙빈왕은 당’고종 말년에 시어사(侍御史) 등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당 고종이 무능하고 우매해 측천무후가 제멋대로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몇 차례 상소를 올렸다가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 지금의 절강성 임해사인 임해(臨海)의 현승(縣丞)으로 좌천됐다.
이 시는 38세쯤 되던 당’고종 의봉(의봉) 3년인 678년경,
감옥 안에서 지은 것이다.
옥중에서 매미소리에 감응해 서문을 쓰고 시를 지었다.
제1-2구는 가을날의 매미소리에 촉발돼 감옥에 갇힌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고 있다.
제3-4구는 죽음을 앞두고 처절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듯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제5-6구는 가을이 돼 이슬과 바람이 많아짐으로써
매미가 점차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묘사했다.
자유롭지 못한 수감생활을 비유한 것이다.
제7-8구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할 데 없는 슬픔으로 표현했다.
사물을 빌려와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이른바 차물우의(借物寓意) 기법에 해당한다.

이 시는 唐 高宗 儀鳳 3년(678) 낙빈왕이 38세 되던 무렵에 쓴 것이다.
시 속의 白頭라는 표현으로 보아 장년의 나이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낙빈왕은 장안의 侍御史가 되어 누차 간언을 올렸다가
武則天에게 밉보여 뇌물을 받았다는 무고를 입고
1년여 동안 옥에 갇히게 된다.
매미를 통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노래하면서
울울히 맺힌 마음을 담고 있는 詠物詩이다.
옛사람들은 매미가 바람과 이슬을 먹고 살아 성품이 고결해
군자, 達人과 같은 고상한 情操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매미를 읊은 시가 적지 않은데,
이 시엔 매미에게 가지고 있었던 옛사람들의 이러한 이미지가 잘 투영되어 있다.
字는 觀光이고, 무주 義烏 출신이다.
初唐의 詩人으로 '初唐四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성품은 호방하고 거만하면서도 강직하여 일찍부터 으레 도박꾼들과도 놀곤 하였다고 한다.
高宗 말년에 長安主簿가 되었는데,
당시 고종의 황후로 실권을 휘두르던 측천무후를 공격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가
절강의 臨海丞으로 좌천되자 출세에 뜻을 잃고 관직을 떠나버렸다.
그러던 684년 徐敬業이 측천무후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그의 府?으로서 서경업의 거병을 옹호하고
동시에 측천무후를 공격하며
그 죄를 천하에 전하여 알린다는 취지의 檄文을 기초하였는데,
측천무후는 이 격문을 읽던 중
"一抔土未乾, 六尺孤安在
(무덤의 한 줌 흙도 마르지 않았는데 여섯 자밖에 안 되는 고아는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라는 구절에서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격문을 지은 자의 이름을 물었고,
낙빈왕의 이름을 듣자 「이런 인재를 불우하게 내버려두었으니 이는 재상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경업의 거병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낙빈왕은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잡혀 죽었다는 설도 있다).
錢塘의 靈隱寺에 숨어 살았다는 전설도 있는데, 절을 소재로 한 시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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