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감상
Ⅰ.서론
Ⅱ.본론
1.五言絶句 : 偶吟 / 宋翰弼
2.五言律詩 : 漫興 1 / 奇大升
3.七言絶句 : 夏雲 / 元天錫
4.七言律詩 : 思親 / 申師任堂
Ⅲ.결론
Ⅳ.참고문헌
Ⅰ.서론
모든 나라가 말을 글을 가지고 있겠으나, 말은 있으면서 글자가 없는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말은 있었는데 글자는 없었다. 중국의 한자가 우리말의 표기수단이 되어 조선까지 모든 기록이 한문으로 기록되다가 세종대왕께서 우리 한글을 만드시어 떳떳한 문자가 있게 된 것이다. 중국의 한자가 들어오면서 중국의 한시도 들어와 우리 시 마냥 읽히고 한시작법으로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읊어 중국의 시와 구별이 없는 형식의 시가 되었다. 시는 그 나라의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비록 한문으로 지어졌지만, 우리 조상들의 글에는 우리의 문화와 고유한 얼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본 과제물에서는 이중에서 평소에 애송하던 우리 한시 4首를 골라 감상해 보기로 한다.
Ⅱ.본론
Ⅰ. 五言絶句
偶吟 / 宋翰弼
花開昨夜雨 어제 밤비에 피었던 꽃이
花落今朝風 오늘 아침 바람에 떨어졌다.
可憐一春事 가여워라! 한 해의 봄이
往來風雨中 비바람 속에서 왔다가 가는구나.
[작가의 전기]
송한필(宋翰弼) 자 계응(季鷹), 호 운곡(雲谷), 본관 여산(礪山)으로 조선시대 중기(16세기 중엽)의 학자이며 문장가이나 생몰연대 미상이다.
아버지가 얼손(孽孫. 첩의 자식)이었기에 신분상의 제약을 받다가 양민이 되었다고 하며. 그의 형 익필과 함께 학문이 높았다. 율곡 선생이 이르기를 ‘성리의 학을 논할 만한 사람으로는 익필 형제뿐이라.’ 한 말에서 그의 높은 학문적 경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서 분쟁에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하여 미움을 받아 1589년에 노예로 還賤되어 일족이 모두 흩어졌기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주요용어]
可憐: 가련하다. 憐:불쌍히 여기다. 어여삐 여기다. 사랑하다.
[작품의 감상]
平起式 東韻 오언절구다.
전체적으로 시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시인의 일생을 말해주듯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꽃이 피는 시간도 아침이거나 아니면 해가 뜬 한낮이 아니라 비 내리는 밤중이다. 왜 한밤중에 꽃이 피었다고 했을까? 꽃이라는 식물이 낯에 그 꽃이 펴야 벌 나비가 찾아들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마련인데 한밤중, 그것도 비가 내리는 한밤중에 꽃이 피다니.
그나마 그 꽃도 아침 바람에 떨어졌다. 미쳐 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전에 낙화가 된 것이다. 그 짧은 동안을 위해 꽃이 피었단 말인가? 한밤중에 피었다가 아침에 떨어져 버린 꽃은 무얼 말하고자 함인가? 바로 3구에서 ‘가련하다’로 표현되었다. 이 시에서 전체를 압축하는 한 단어를 꼽는다면 바로 이 可憐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가련한가? 바로 시인 자신의 운명임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밤사이에 피었다가 아침 바람에 떨어진 꽃, 그것은 시인의 일생에서의 변화가 이처럼 짧고도 허무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일장춘몽 같은 짧은 인생은 더욱 가련하다.
밤비와 바람은 그 시대의 권력이다. 서얼로 태어나 뛰어난 학문으로 벼슬자리에 겨우 나섰으나 이내 몰락하여 천민이 되어버린 그 운명은 권력이라는 비바람을 이길 수가 없다.
그의 삶이 권력의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낙화되어 스러지니 참으로 가련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 비바람 속에서 왔다가 가는 시인의 심정이 잘 녹아있다.
Ⅱ. 五言律詩
漫興 1 / 奇大升
故山春雨後 산중에 봄비 내린 후
花發蕨芽肥 꽃 피고 고사리도 돋아난다.
謾欲尋芳去 부질없이 향기를 찾아 떠나
應須詠月歸 달빛에 시 읊고 돌아오련다.
松醪滿盎嫩 소나무 새순으로 빚은 술 동이에 가득하고
石菜著根馡 돌밭에 나물도 향기롭구나.
醉臥風生耳 취해 누우니 바람이 귓가에 일어
陶然忘世機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일을 잊노라.
[작가의 전기]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재주로 문명을 날렸다. 알성시에 합격했으나 기묘명현 준의 조카라는 이유로 윤원형이 낙방시켰다.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32세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 김인후 등 호남의 석유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했다. 스승 이황과는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간 사단칠정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한국 성리학사의 최대 논쟁으로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양선생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에 남아있다.
고봉은 퇴계가 죽은 후 아래와 같이 제문을 지어 올렸다.
“근년 이래로 저는 전리에 엎드려 있어서 비록 학문을 연구하고 탐색하는 일에 힘을 다하지 못합니다만 때로는 한두 가지 새로운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묻거나 따져서 바로 잡을 곳이 없으니 매양 옛날 선생께 왕복하며 사리의 옳고 그름을 밝히어 말하던 즐거움을 생각하면 더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스승의 빈자리가 컸다. 고봉은 다른 글에서 ‘태산은 평평해질 수 있고 돌은 닳아 없어질 수 있지만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6년의 나이 차이에도, 학설의 다름에도 퇴계는 어린 후배를 존경했고 기대승은 스승 퇴계를 극진히 섬겼다. 고봉도 스승을 잃고 2년 후에 죽었다.
퇴계가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 고봉을 추천했다.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이 사람은 통유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평했다.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으로 기묘사화와 양제역 벽서사건으로 화를 당한 조광조·이언적의 추증을 건의했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이어 종계변무주청사로 임명되었다. 병으로 귀향길에 오르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죽었다. 45세의 젊은 나이었다.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헌이다. 서원 뒷산에 그의 무덤이 있다. 문집으로 ‘논사록’, ‘고봉집’등이 있다.
그는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일 것인가, 오직 임금이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임금에 대한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요구했다. 또한 "언로는 국가의 대사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비를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호남의 정신적 지주였다. 왕도 정치의 이상을 품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지 못했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강직했다. 그런 철학자가 그리운 세상이 되었다.
[주요용어]
故山: 고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蕨: 고사리 궐
謾: 속일 만, 업신여길 만. 속이다. 공연히 까닭 없이.
醪: 막걸리 료. 松醪: 소나무 새순으로 담근 막걸리
盎:동이 앙. 넘치다. 넘쳐흐르다.
嫩:어릴 눈, 어리다. 어리고 연약하다.
馡: 향기로울 비.
陶然: 도는 질그릇 외에 즐겁다는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도연명처럼 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작품의 감상]
平起式 微韻의 오언율시다.
이 작품은 기대승의 만흥 3수 중 제1수이다. 閉門終夜雨로 시작하는 만흥 2와, 淸晨起對書로 시작하는 만흥3의 오언율시가 있다.
봄비 내린 다음날 들판은 한껏 푸르다. 비가 내렸으니 온 세상이 녹색이요, 온갖 나물들이 싹트고 줄기 뻗으니 산과 들이 향기롭다. 날씨는 화창하고 달빛 밝으니 떠오르는 시상이 어찌 없겠는가? 하릴없이 들판을 헤매다가 어디엔가 정자에 누워 시 한수 읊으려 집을 나선다.
시가 있으니 한 잔 술이 없을 수 없다. 봄에 소나무 새순을 따서 담근 술이 벌써 익었으니 그 술 냄새 향기롭다. 게다가 고사리 꺾고 들나물 무쳐 술안주 삼으니, 새 술에 풋풋한 안주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소위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세상에 이 순간처럼 근심 걱정 없는 순간도 없다. 들판에 누었으니 귓가에 봄바람 살랑이고 비록 한 순간이나마 근심걱정 사라졌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마치 도연명의 귀원전거처럼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은근히 담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陶然忘世機을 ‘즐거운~’이라고 하는 것 보다. ‘도연명처럼~’ 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Ⅲ. 七言絶句
夏雲 / 元天錫
變成千狀眼前橫 천 가지 모습으로 눈앞을 가로 막더니
更作奇峰勢不平 다시 기이한 봉우리 되어 들쑥날쑥 피어나네.
拖雨駕雷飜覆頻 비를 품고 천둥을 타며 자주 뒤집히다가
漏星藏月卷舒行 별을 토하고 달을 숨기며 자유롭게 다니네.
[작가의 전기]
元天錫 1330(충숙왕 17)~ ? 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문인으로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原州) 아전층의 후손으로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이며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문장과 학문으로 경향간(京鄕間)에 이름을 날렸으나, 출세를 단념한 채 한 번도 관계(官界)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은사(隱士)로 지냈다. 군적(軍籍)에 등록될 처지가 되자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그는 이방원(뒤의 태종)의 스승을 지낸 적이 있어 태종이 즉위 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치악산에 있는 그의 집으로 친히 찾아와도 자리를 피했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하였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야 백의(白衣)를 입고 서울로 와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비록 향촌에 있었으나 여말선초의 격변하는 시국을 개탄하며 현실을 증언하려 했다. 만년에 야사(野史)를 저술해 궤 속에 넣은 뒤 남에게 보이지 않고 가묘(家廟)에 보관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증손 대에 와서 사당에 시사(時祀)를 지낸 뒤 궤를 열어 그 글을 읽어보았는데, 멸족(滅族)의 화를 가져올 것이라 하여 불태웠다고 한다.
문집으로는 〈운곡시사 耘谷詩史〉가 전한다. 이 문집은 왕조 교체기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관한 소감 등을 1,000수가 넘는 시로 읊은 것으로 제목도 '시사'(詩史)라 했다. 야사는 없어졌으나 이 시가 하나의 증언으로 남아 있어 후세의 사가들은 모두 원천석의 증언을 따랐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로 시작하는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시조 1수가 전한다.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용어]
拖=이끌 타.
駕=멍에 가.
翻=飜 날 번.
頻=자주 빈. 瀕물가 빈으로 된 판본도 있다.
舒=펼 서.
[작품의 감상]
仄起式 庚韻 칠언절구다.
한 여름 농부가 힘든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쳐다본다. 땀을 씻으며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뭉게뭉게 솟고 그 구름 모양이 천 번 변하고 만 번 변화하니 그 모습 헤아릴 수 없다. 산을 가리다가 멀리 새로운 산을 만드니 쳐다보고만 있어도 무궁무진한 자연이 감탄스럽고, 구름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근심 걱정 없이 하늘을 나는 듯 한가롭다.
3구에 이르러, 저 하늘이 언제 구름 껴 비 내리고 벼락치고 번개를 쳤던가?
천하가 요동치던 격변기에 어디에 몸을 두어야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일까 고민하던 시인의 마음이 아련히 느껴진다. 하늘은 예와 다름없으되 왕조는 세력다툼으로 피비린내를 풍기고, 뜻 있는 선비들은 세파를 피해 숲속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속세를 저만큼 벗어나 있는 농부에게는 세상일에 별 관심이 없다. 다만 하늘이 도와 농사만 잘 지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결구에 이르러 어두운 밤하늘을 다시 올려다보니, 천둥벼락 치던 구름은 어디가고 별을 쏟아 붓고 달을 가리고 여는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구름만 무심히 떠다니고 있다. 하늘은 늘 그러하듯 변화무쌍하지만 그 本은 항상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Ⅳ. 七言律詩
思親 / 申師任堂
千里家山萬疊峯 천리 고향땅은 첩첩 봉우리 넘어
歸心長在夢魂中 돌아가고픈 마음 꿈속에 길게 남네.
寒松亭畔孤輪月 한송정 언덕 외로운 달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 앞 한줄기 바람.
沙上白鷺恒聚散 백사장 백로는 모였다 흩어지고
海門漁艇各西東 포구의 고기잡이 배 동서로 흩어진다.
何時重踏臨瀛路 언제 강릉길을 다시 밟아
更着斑衣膝下縫 색동옷 입고 어머니 슬하에서 바느질 할까.
[작가의 전기]
조선중기의 여류 서화가로 본관 평산(平山). 호 사임당(師任堂: 思任堂: 師妊堂)이다. 강원 강릉 출생.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針工)·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山水·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작품으로 시에<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사친(思親)>등이 있고, 그림에<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등이 있다.
사임당은 19세에 결혼한 후에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친정인 강릉과 서울의 시댁을 오가며 양가를 봉양했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공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그리 출중한 실력을 가진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혼시절 신사임당은 남편의 출세를 위해 10년 별거를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몇 달 못 가서 남편은 다시 돌아왔고, 결국 사임당은 그에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인의 마음을 이해한 남편은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사임당은 7남매나 되는 자녀들에 대해 딸,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그림을 가르치며, 인성과 감성을 함께 길러내었다. 남편을 잘 보필하고, 가정을 잘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아녀자가 현명해야 한다는 것이 사임당의 지론이었다. 자녀들에 대한 양육에 있어서 가장 귀감이 되는 분이라는 것에 아직까지 이견이 없다.
이는 신사임당 또한 강하고 현명하신 그 분의 어머니에게 받은 영향으로 생각된다. 홀어머니에 대한 사임당의 지극한 효심도 유명한데 사임당의 자녀들이 훌륭하게 자란 것도 그 어머니의 삶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천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진정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주요용어]
臨瀛: 임할 임. 바다 영. 지금의 강릉을 가리킨다.
斑衣: 색동옷. 班衣之戱라는 성어가 있다. 춘추시대 초나라 老萊子는 그의 어머니가 70이 된 자식을 보고는 ‘아들이 이렇게 늙은 것을 보니 우리 살날이 엄마남지 않았구나.’ 탄식하는 걸 듣고, 색동옷을 지어 입고 작은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는 등 재롱을 떨어 노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작품의 감상]
仄起式 東韻 칠언율시다.
강릉에서 시집으로 돌아가는 언덕길은 험한 길이다. 대관령에서 내려다보니, 고향마을은 첩첩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강릉. 그 고향땅은 아득히 먼 길이지만, 꿈에도 생시에도 돌아가고픈 마음뿐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한송정 가에 외로이 뜬 달 그리고 경포대 앞을 스치는 한 가닥 바람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갈매기 떼는 모래밭에 모이고 흩어지고 바닷가에 고깃배 동서로 오락가락 하는데 이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때나 고향 길 다시 돌아가서 색동옷 갈아입고 그리운 어머니 무릎 밑에서 바느질해볼까.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이 곳곳에 묻어난다.
수련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에 대한 회상은 천리 길과 첩첩의 봉우리로 고향땅을 표현하고 있다. 천리나 되는 머나먼 고향 길과 그 길은 첩첩 수많은 산으로 둘러싸여 가고는 싶으나 갈 수가 없음을 대구로 하였으며, 頷聯 頸聯에서는 고향의 정경을 그림 그리듯 묘사하였다.
尾聯에서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시인의 소망을 표현했다. 특히 미련에서 색동옷 입고 어머니 무릎 아래에서 바느질하고 싶다는 표현은, 나이 칠십에도 어머니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늙으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는 老萊子의 고사를 인용했다.
Ⅲ.결론
시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느낀다는 것은 감정이입이 되어야 가능하다. 옛 글을 읽으면서 어려운 한문과 특수한 표현, 용사 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접할 때마다 부족한 감을 감출 수 없다. 그러니 감정이입이 어렵다. 다만 막연하나마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내 글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평기식. 측기식, 음운규칙 등을 따져보는 것은 너무 어려워 미진한 바 있다.
Ⅳ.참고문헌: 1. 인터넷 daum.net. 백과사전. 지식.
2. 인터넷 naver.com.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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