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은 달마-혜가-승찬-도신-흥인-혜능으로 이어진다.
5조대사 흥인의 제자 신수가 시를 지었다.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마음은 맑은 거울 받침대로다
時時勤佛式 (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 먼지와 티끌이 끼지 못하게 하자.
이에 글을 모르는 혜능이 동자승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계송을
신수의 글 반대편에 붙여놓았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으며
明鏡亦無臺 (명경역무대) 맑은 거울 또한 받침이 없다네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래 아무 것도 없는데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어디에서 티끌과 먼지가 인다고 하는가
혜능의 시는 진리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마음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불교의 진리를 제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신수가 때때로 털어내고 닦아 내는 漸修(점수)를 말한 것이라면,
혜능은 한꺼번에 깨닫는 頓悟(돈오)를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논할 때 원효와 지눌을 빼놓을 수 없다.
●원효는 더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당나라로 가던 중
움집인 줄 알고 잠을 잔 무덤 속에서 목이 말라 해골에 고인 물을 먹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자신이 해골 물을 마신 것을 깨닫고 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어제는 달게 마신 물인데 오늘 이처럼 구역질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해골의 물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원효가 깨달은 것이,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불교의 진리였다.
원효의 논리를 요약하면
화쟁의 논리
개합(開合): 열면 무수한 이론이, 합치면 하나로 돌아감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곧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다.
대립과 모순을 벗어난 中道의 논리
내 주장을 세우지 않은 것도 아니며, 남의 주장을 부수지 않은 것도 아님
大乘起信論: 대승불교의 개론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一心二門(眞如문과 生滅문): 한 마음에 두 개의 문
●지눌은 혜능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으로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곧 이 마음(佛卽是心)이라 했고,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自心是佛心)이라고도 했으며
스스로의 마음이 참 부처(自心是眞佛)라고도 하였다.
지눌은 내 마음을 떠나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퍼다가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牧牛子는 지눌의 호다.
尋牛圖 - 소를 찾는 그림. 깨달음을 얻고 나면 집착하지 않고 살 뿐이다.
‘因地而倒 因地而起(인지이도 인지이기)’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디뎌야 일어난다.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디뎌야 깨달을 수 있다.
頓悟漸修. 점수(漸修): 타성을 버리기 위해 점수가 필요하다.
돈오(頓悟):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것.
선오후수(先悟後修): 돈오 후에 점수한다.
無心: 마음 없음이 아닌 마음을 비우는 것. 마음을 비워야 온 세상의 참모습이 보인다.
정리하면
원효가 교종의 다양한 주장을 하나로 합쳐 들인 전통은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합치고 다시 그 위에 선종을 합쳐서
敎觀兼修(교관겸수)를 주장한 것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보조국사 지눌에서는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진 선종을 頓悟漸修(돈오점수)로 합치고
여기에 다시 교종을 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원효는 敎宗을 지눌은 禪宗을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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