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류

중국현대사 개괄

甘冥堂 2013. 4. 14. 00:16

 

중국현대사

 

목차

1. 유럽의 굴기와 약탈세계(1)

2. 유럽의 굴기와 약탈세계(2)

3. 중국문명의 연속성

4. 길고긴 봉건사회

5. 18세기 중국의 세계지위

6. 청왕조의 성쇄

 

 

1.유럽의 굴기와 약탈세계(1)

 

14~15세기 유럽사회의 상품경제는 점차 발전하였으며 유럽인들은 더욱 많은 귀중한 금속과 동양으로부터 온 귀중한 상품을 얻기를 갈망하였다.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전해진 <마르코 폴로 여행기>는 동양을 황금이 도처에 있고 향료가 들을 채우고 있다“고 묘사했다. 유럽인들은 이 주장을 믿었는데 왜냐하면 아시아는 줄곧 유럽에서 수많은 귀중한 상품의 주요한 공급지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동양에 대한 무역은 줄곧 간접무역이었다. 인도 상인, 아라비아 상인과 이탈리아 상인을 거쳐 전매하면 향료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8~10배 이상으로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고액 이윤은 대서양 연안의 서구 상인들로 하여금 침을 흘리게 했다. 서구의 귀족과 상인은 동양으로 가는 상로를 별도로 열어 재산을 모으고 부를 쌓기를 갈망하였다.

당시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무력에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가장 먼저 확장의 눈빛을 유럽 대륙 바깥의 지역에 던졌다.

 

기독교는 선교를 위하여 기꺼이 무력을 사용하여 ‘성전’을 진행하였는데 이것도 유럽인들이 해외로 확장하는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몇 세기의 노력을 통하여 유럽인들은 조선과 항해 기술 분야에서 매우 큰 진보를 취득하였으며 원양항해의 조건을 갖추었다.

아시아와 직접무역을 진행하는 항로를 발견하기 위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각기 동쪽과 서쪽을 향한 노선의 해상탐험을 지원했다.

포르투갈 왕실의 지원하에 1487년 디아스는 세 척의 간이범선을 이끌고 아프리카 최남단의 곶에 도착했다.

1497~1498년 바스코 다가마는 포르투갈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인도에 도달하여 동서양 간 최단의 해상항로를 개통하였다.

1499년 바스코 다가마 선대는 포르투갈로 돌아와 판매한 향료의 획득한 이윤은 출항원가의 몇 십배였다. 포르투갈은 곧 또 더욱 큰 선대를 인도에 파견하였다.

 

스페인 왕실의 지원하에 1492년 콜럼버스는 3척의 범선을 이끌고 70일간의 간고한 항행을 거쳐 미주에 도착했다. 이후의 8~10년간 콜럼버스는 또 3회 서쪽으로 항행했다.

1519년 스페인 왕실의 지원하에 포르투갈 귀족 마젤란이 이끄는 선대는 3년의 시간에 인류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 항행을 완성했다.

마젤란 선대의 항행은 매우 간고했다. 출항 시 선대에는 5척의 배와 200여명의 선원이 있었는데 마지막에는 1척의 배와 18명의 선원만이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마젤란 본인도 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었다.

신항로가 열린 이후에 유럽의 상인과 식민자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사이에 직접적인 상업연계를 건립하여 광활한 세계시장을 초보적으로 형성했다.

그들은 무역과 약탈을 통하여 모든 대륙의 상품을 끊임없이 유럽으로 들여와 유라시아 대륙의 한끝인 서구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주요한 상로와 국제무역중심은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대서양 연안으로 전환되었다. 아탈리아의 베니스, 제노아(熱那亞) 등의 상업도시는 쇠락했다.

먼저 리스본과 세빌리아(塞維兒)가 나중에는 안트베르펜(安特衡普)과 암스테르담(阿姆斯特丹)이 또다시 나중에는 런던 등의 도시가 국제무역중심이 되었다.

 

유럽인들의 ‘불과 검’의 식민 확장 활동 중에 미주의 전통사회는 치명적인 재난을 만났다.

그러나 미주의 금은광의 채굴과 플랜테이션(種植園) 경제는 유럽의 자본 원시축적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신항로가 열린 이후에 아프리카는 흑인 노예를 사냥하는 장소가 되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15세기에 서아프리카 해안의 흑인을 유럽 귀족에게 팔기 시작했다.

1502년 첫 번째 무리의 흑인노예가 미주로 보내졌는데 대서양을 건너는 노예무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유럽 식민자는 아시아에서 대륙연안의 거점과 도서들을 점령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유럽의 상품은 아시아에서 경쟁력이 없었고 유럽인들은 미주의 백은을 사용하여 아시아의 상품을 구매하였는데 예를 들면 방직품과 자기, 향료, 염료 등이었다.

백은의 대량 유입은 아시아 경제의 발전도 자극하였다.

 

신항로가 열린 초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동서 兩半球에서 앞장서서 식민 약탈활동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무력에 의지하여 유럽으로부터 아프리카 연해를 거쳐 아시아까지의 해상무역노선을 독점하였다.

그것은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 해안에 수많은 거점을 세웠고 나아가 동남아로 통해 가는 요충지인 말라카를 통제하고 인도, 인도네시아의 연해거점들과 도서 그리고 중국의 마카오를 탈취했다.

스페인은 중남미주에 방대한 식민제국을 수립했다.

스페인 식민자들은 현지의 금은을 약탈하기 위하여 먼저 토착주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으며 나중에는 노예를 채용하여 금은 지하자원을 채굴했다.

스페인 식민자들은 또 농업 대농장을 세워서 인디안(印第安)을 혹사하여 노동시켰다.

미주 열대 연안지역에 대농원을 세워 아프리카 흑인 노예에게 단일의 작물을 생산시켜서 유럽시장에 공급했다.

 

16세기 때에 네덜란드는 이미 유럽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의 하나였다. 17세기 상반기는 네덜란드 해상무역의 황금시대이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대신하여 제1의 무역강국이 되었으며 ‘해상 마차부’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 무역범위는 서북구의 해역무역과 아시아에 대한 원양무역과 서쪽 신대륙에 대한 무역을 포함했다.

대형 상업회사를 세우는 것은 네덜란드인들의 국제 경쟁에서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회사의 자본은 충분했고 또 배경이 되는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 사람을 패배시키고 동양의 향료무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 상인은 극동지역이서도 활약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대만과 澎湖(팽호)를 한 번 점령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 상인은 이로써 발판을 삼아 중국과 일본과 말레이군도로 가는 상업항로를 장악했으며 당시 유일하게 일본과 무역을 진행하는 서양국가가 되었다.

 

 

2. 歐洲的掘起和掠奪世界(2)

 

신항로가 열린 이후에 스페인과 아메리카 간의 해상운수는 매우 활발해졌다. 영국인들은 스페인 선박에 대하여 해적과 같은 약탈을 진행했다.

이러한 해적행위는 정부의 격려를 얻어서 영국은 ‘해적국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해적이었던 드레이크는 영국 국왕에 의해 ‘기사’ 칭호가 수여되었으며 후에 관직이 해군 대장에 이르렀으며 그는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패배시킨 해전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17세기 영국은 실력이 점차 증강되어 무역 우세를 탈취하고 식민지를 강점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 네덜란드, 프랑스와 일련의 전쟁을 진행했다.

18세기 하반기 영국은 해상 패권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또 북미, 카리브해 도서, 인도와 대서양 등의 식민지를 안에 포함하는 제국을 수립하였다.

영국의 인도에서의 통치는 모두 영국 동인도회사를 거쳐 진행된 것이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산출의 향료, 면직품과 실크제품을 독점하였다.

 

‘명예혁명’이후에 영국사회는 안정되었고 인구와 자본의 유동은 자유로웠고 경제는 안정적으로 발전하였고 공장수공업은 매우 번창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국내외 시장의 끊임없는 확장에 따라서 많은 업종에 기술혁신의 뜨거운 물결이 일어나 기계를 사용하여 생산하는 것이 수공업 생산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공업혁명의 시대가 도래 했다.

당시 영국은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했는데 특허를 보호하여 창조적 발명을 격려하는 것을 포함했다. 많은 지주들이 토지를 구획지어 점거하고 농업과 목축업을 개량하여 생산효율을 높인 것도 많은 농민들로 하여금 농촌을 떠나 자유 노동력이 되게 하였다.

영국은 풍부한 석탄과 철강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용하기에 편했다. 식민지는 영국에 다량의 원료(면화 등)를 제공하여 주었으며 뉴턴 역학의 창립과 보급은 기계발명에 지식을 준비해 주었다.

 

영향이 가장 심원한 기술 변혁 성취는 와트(瓦特)가 개량한 ‘만능 증기기관’이다. 1785년 이런 증기기관은 공장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석탄과 물을 소모하여 동력을 생산하였는데 보편적으로 응용되어질 수 있었으며 인류는 이로부터 ‘증기시대’에 진입했다.

증기동력의 사용은 교통운수업의 혁명을 가져왔다. 1814년 광부 출신의 스티븐슨(史蒂芬孫)은 증기를 사용하여 동력으로 삼는 첫 번째 기차 기관차를 성공적으로 제조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 유럽대륙 그리고 북미에는 철로를 건설하는 붐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철도시대’를 맞이했다.

해상교통 분야에서도 증기로써 동력을 삼은 증기터빈이 출현했는데 그것은 대륙 간의 연계를 강화하는 것에 대하여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공업혁명은 생산력을 급속하게 제고시켰으며 신흥공업 분야가 대량으로 출현했고 도시화 진행이 분명히 가속화되어 영국은 ‘세계 공장’이 되어 세인들로 하여금 놀라고 부럽게 하였다.

구미국가는 잇달아 모방하여 정부의 주도하에 공업혁명을 전개하여 방직업과 철도업이 2개의 앞선 분야가 되었다.

 

19세기 7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 독일, 미국 그리고 프랑스 등 몇 개 공업이 발달한 국가에는 새로운 기술혁신 붐이 출현하여 산업구조의 새로운 변화와 생산력의 큰 발전을 촉진했는데 역사는 제2차 공업혁명이라고 칭한다.

제2차 공업혁명에서 과학은 기술진보의 가장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중요한 발명은 대부분 과학자의 실험실로부터 나왔으며 수공업자의 실천경험이 아니었다.

전력의 응용은 제2차 공업혁명의 뚜렷한 성격의(표지성) 성취이다. 전력은 고효율이고 편리한 에너지로써 근본적으로 공업생산의 면모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활을 직접 변화시켜 세계는 ‘전기시대’를 시작했다.

1866년 독일인 지멘스는 실용적인 발전기를 연구 제조하였으며 전동기도 매우 빨리 발명해 내었다.

19세기 80년대 초 영국은 수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잇달아 건설했다. 전등, 전화, 전차, 전기드릴, 전기용접기 등 전기제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연기관의 발명과 응용도 이시기의 중요한 성과이다. 어떤 독일의 에니지어는 휘발유와 디젤로 연료를 삼는 내연기관을 발명하여 새로운 동력기관으로 삼았는데 내연기관은 증기기관에 비하여 효율이 더욱 높았고 기동성도 더욱 좋았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내연기술을 교통사업에 광범위하게 응용하여 자동차, 비행기 등 신형 교통수단을 연구제조해 내었다.

이 시기에 새로 일어난 화학공업은 현저한 발전을 얻었다.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李比希)는 유기비료를 사용할 것을 가정 먼저 제안하였고 그의 제자 백금은 인류의 첫 번째 인공합섬염료를 발견하였으며 스웨덴(瑞典) 화학자 노벨(諾貝爾)은 화약을 발명하였다.

 

공업혁명은 공장수공업으로부터 기계대공업으로까지의 비약을 실현했으며 새로운 시대-공업시대를 열었다.

공업혁명전에 유럽의 공장 수공업은 대부분 하청형식으로써 가정에 분산되어 생산하였으며 집중하여 생산하는 공장은 매우 보기 드물었다.

공업시대에 들어가 공장제도는 가장 보편적인 생산조직이 되었다. 공장은 생산재료와 노동자를 한곳에 모아놓고 기계사용을 통해 대량생산을 진행했다.

공장은 세밀한 분업과 엄격한 규율을 시행했다. 공업시대 초기에는 중소기업이 다수를 점했다. 기업주는 자본소유자이면서 또 기업경영 관리자이었다. 그들은 열 몇 명, 몇 십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을 진행했다.

 

제2차 공업혁명 이후 경제는 갑작스럽고 맹렬하게 발전하였으며 생산과 자본에 집중하는 추세가 출현하여 기업규모는 갈수록 커졌다. 대기업시대가 도래하였다.

미국의 모건, 록펠러, 멜런, 듀퐁 등의 ‘8대 그룹.’ 일본의 가족재벌로써 중심삼은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모토, 야스다’ 4대 재벌, 그리고 독일의 제너럴 일렉트릭, 라인-웨스트팔리아 석탄업 등은 모두 규모가 전에 없던 대기업이다.

그들은 1개 혹은 많은 분야의 생산과 경영을 통제하였다. 이들 대기업은 항상 고급 전문인재가 관리를 진행하였으며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되어 생산효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제2차 공업혁명 이후에 자본수출 즉 대외투자의 규모는 부단히 확대되어 구미 투자국과 자금접수국 간의 연계를 강화하였다.

영국은 먼저 남미, 이집트, 인도 등지에 투자했는데 그것을 사용하여 주로 철도와 기타 기초시설을 건설하였다.

이런 투자는 두터운 이윤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이 공업품을 팔고 원재료를 구입하는 데에 직접 기여하였다. 공업국의 생산영역에서의 투자는 자본수입국의 생산 방향도 인도하였다.

수많은 국가는 1종 또는 소수 몇 종 생산품의 생산국이 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집트는 면화를 생산하고 브라질은 커피를 생산하고 칠레는 초산염과 구리를 생산했으며 볼리비아는 주석을 생산하는 등이다.

 

구미공업국은 해외로 향하는 확장의 과정 중에서 언제나 무력을 동원하여 낙후한 국가들을 핍박하여 그들의 통상과 투자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심지어 식민통치를 직접 실행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일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구미 열강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가 되었고, 아프리카 대륙의 영토는 기본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끝났으며, 정치독립을 얻은 라틴 아메리카는 경제면에서 또 다시 열강의 지배를 받았다.

구미 열강은 단단한 선박과 매서운 대포를 사용하여 전 세계를 세계시장에 말아 넣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구미 공업 국가는 전 세계범위로부터 그들이 필요한 원재료와 초급 생산품을 획득하였으며 공업품을 팔아넘기고 투자를 진행했는데 그들 간의 화폐는 자유로이 바꿨으며 그들 중의 한 국가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타국에 파급되고 심지어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구미공업국으로서 주도를 삼은 (구미공업국이 주도하는) 통일된 세계시장이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제국주의: 자본주의 열강이 진행한 패권을 쟁탈하고 식민지를 침략, 약탈한 신식민주의가 제국주의로 불려진다.

 

 

3. 중국문명의 연속성

 

중국문명이 길게 이어져 오래 갈수 있었던 한 가지 원인은 지리방면에 있다.

그것이 인류의 기타 위대한 문명과 서로 떨어진 정도는 세상에 겨룰만한 쌍이 없다.

지중해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를 함께 연결해 주며 인도양은 인도로 하여금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 준다.

상반되게 중국은 그 유사 이래의 대부분의 시간에 사면이 산맥 사막 그리고 드넓은 태평양에 의해 줄곧 가로막혀 있었다.

세계와 떨어져 있다는 이런 의미는 그것이 중국으로 하여금 중동 혹은 인도의 여러 민족과 비교하여 외래 침략을 더욱 적게 직면했다는 상황 하에서 자신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중국의 문명은 더욱 연속성을 갖추었으며 더욱 독특하기도 하였는데 중국과 유라시아의 기타 위대한 문명 간에는 후자 상호간에 비하여 더욱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국의 인구가 방대하여 비할 것이 없는 것도 문명의 연속성에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시작하자마자부터 대단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곳의 토양과 기후 조건은 매우 잘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기후가 온화한 몇 개월 동안에 계절풍우가 오면 양자강 남안의 일부 지역의 농작물로 하여금 1년에 2회 추수할 수 있게 하는데 이런 상황은 중동과 유럽에서 1년에 1회 추수하는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뿐만 아니라 중국 논벼의 1무(200평)당 생산량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 지역에서 심은 밀과 보리의 1무당 생산량보다 많았다.

16세기 초엽 포르투칼 사람이 처음 중국에 도달했을 때에 중국의 인구는 1억 명이었는데 전체 유럽의 인구를 초과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이 포함을 사용하여 중국의 대문을 강제로 열었을 때에 중국의 인구는 이미 4억 이상으로 격증하였다. 이것은 일정한 정도에서는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땅콩, 옥수수 감자류와 같은 여러 양식작물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비할 바 없이 거대한 인력자원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사태의 발전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의 특징을 시종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몽골인과 만주인에 의하여 정복되고 통치되어진 적이 있으며 서양의 몇 번의 타격과 파괴도 받았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 사람 숫자와 문화상의 우세로 말미암아 그들은 늘 침입자를 동화시키거나 몰아냈으며 언제나 외래문화의 어떤 분야를 선택하여 변형을 가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자기의 전통문화에 적합하게 만들 수 있었다.

중국은 유럽이 게르만인들의 침입을 받았을 때 혹은 중동과 인도가 무슬림의 침입을 받았을 때처럼 그렇게 외부로부터 온 대규모의 변혁을 강제로 받은 적이 없다.

 

중국 역사의 발전은 이런 지진과 같은 격변에 의해 동요된 적이 없다.

전체 국가가 일찍이 여러 차례 침입을 받고 또 외래 왕조에 의해 두 번 통치되었으나 이런 침입은 소란일 뿐이었으며 중국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중국이 유사 이래로 경험한 것은 전통적인 테두리에 한정되는 왕조의 흥망교체였을 뿐이었고 대규모의 파괴와 새로운 시작은 아니었다.

이런 주기적인 왕조교체는 중국 역사 중에 반복적으로 출현한 어떤 특징들을 사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될 때에는 통상 효과적으로 국가를 통치하여 비교적 평화롭고 번영하는 시기를 연다.

신 왕조는 사상과 문화생활을 촉진하고 또한 원정군을 파견하여 유목민에 대처하고 제국의 강역을 확대하는 것을 통하여 국가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점점 왕조는 개별통치자 본인의 부패타락과 귀족집단과 궁정환관 간의 궁정투쟁으로 말미암아 쇠약함을 만난다.

이런 부패타락과 파벌활동은 암암리에 중앙권력을 파괴하고 관료기구의 부패를 조장했다.

부패에 덧붙여 궁정생활이 갈수록 더 사치하게 된 것은 생산노동에 의지하여 전체 제국 조직을 부양하는 농민이 부담하게 되는 세금이 최종적으로 더욱 무거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금이 증가해 간 것은 또 대외전쟁 경비가 거대하고 황제가 다수 귀족, 불교 사원과 묘당의 면세를 허락하는 방법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가 갈수록 게을러짐에 따라서 농민에게 필수적인 관개 시스템과 기타 공공 공사가 자주 무시되었다.

이 때문에 갈수록 곤궁에 빠진 농민들이 날로 가중되는 세금 부담을 부득불 짊어져야 했다.

농작물의 흉작과 기근이 불가피하게도 도래했을 때 폭발점이 온다. 정부의 세리와 지주의 소작료 징수대리인에 반항하는 의거가 폭발한다.

결국 어느 날 이들 국부적인 봉기는 보편적인 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들 보편적인 폭동은 방향을 바꾸어 또 유목민의 침입을 초래했는데 특히 제국 군대 자체가 오히려 이 단계에서 이미 억지로 유지되는 상황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내부의 반란과 외부의 침략이 서로 결합한 것은 통상 순환의 출발인 구 왕조가 멸망에 직면하고 신 왕조가 점차 다가온다는 것을 예시한다.

 

중국의 첫 번째 왕조는 商인데 황하 유역 북부에서 흥기했다. 그때 중국인은 이미 비단을 짤 줄 알았고 그들의 독특한 문자시스템을 발명했으며 아름다운 도기와 청동기를 제작하는 기술을 장악하였고 아울러 종족상의 우세가 아닌 문화상의 우세에 근거하여 중국인과 야만인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상의 뒤를 이은 周(기원전 1028~221년)는 경과한 시기가 매우 오래이지만 그러나 안정적인 중앙정부를 수립하지는 못했다.

周의 정치구조는 중세기의 유럽을 약간 닮았다. 주에는 수많은 봉국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의 명의상의 최고 영주 지위를 무시하여 피차 전쟁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동란의 편안하지 않은 정치국면은 중국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다급하게 반성하게 하였다.

그들의 인간성과 사회 본질에 대한 사색은 결국 중국문명의 모든 위대한 철학체계와 문학경전이 되었다.

유가와 도가의 양파 학설은 이때에 발전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의 전체 중세기와 같이 장구한 주의 수백 년은 중국문화의 기초를 정립한 시대로 간주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주 이후의 진(기원전 221~206년)은 존재한 시간이 매우 짧지만 매우 엄밀하게 조직된 제국 구조를 사용하여 주의 분봉제를 대체하였다. 이런 제국 구조는 간혹 실수도 있긴 하였으나 1912년 최후의 1개 왕조가 전복될 때까지 줄곧 지속되었다가 비로소 종말을 고하였다.

해당 구조에는 대권을 독점한 황제, 훈련이 잘된 효과적인 관료기구, 군용 도로망과 북쪽의 장성들이 포함된다. 모든 이것들은 중국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오랜 통치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진을 계승한 한 왕조(기원전 206~서기220년)는 사방으로 중국 강역을 확장함으로써-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북으로는 만주에 달하고 남쪽으로는 인도차이나에 달했다-유명해졌다.

한제국은 영토, 인구, 경제력과 문화 성취 분야에서 최소한 당시의 로마제국과 필적할 수 있다. 한 이후 일정 시기의 혼란을 거쳐 당조(618~907년)와 송조(960~1279년)가 잇달아 일어났다.

그것들에게는 어떤 변경과 개선이 있긴 하였으나 그러나 여전히 전통문명의 계승을 대표하였다.

 

송 이후의 원조(1279~1368년)는 매우 독특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이 아닌 몽골인의 왕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 몽골인은 당시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때의 중국은 동쪽으로는 태평양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흑해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제국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 몽골 통치자는 사람 숫자에서 그들의 수많은 중국 신민에 비하여 불쌍할 정도로 적었으며 또한 중국 귀족과 농민의 옹호를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정복자의 신분으로서 통치를 진행하였으며 중국의 제도나 혹은 중국인의 생활방식에 대하여 어떠한 양보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의 군사력이 쇠락하였을 때 그 정권도 일어나 반란을 한 농민과 마음에 불평을 품은 사대부에 의해서 전복되었다.

중국은 몽골인을 몰아낸 후에 다른 두 왕조, 즉 중국인의 명조(1368~1644년)와 만주인의 청조(1644~1911년)의 통치를 또 받았다.

만주인은 몽골인과 마찬가지로 타민족이지만 중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정부기관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때 중국 사대부에게 높은 지위와 참정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전통의 제도와 습속-농민경제, 유가 생활방식, 정부 관리를 선발하는 고시제도와 북경에 거주하는 천자의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통치-은 줄곧 순조롭고 만족스럽게 계속되었다.

 

만약 보통의 시대였다면 이러한 질서와 지구력은 아마 기쁜 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세기는 생기발랄한 신 유럽이 바로 흥기하고 있었던 세기였고 문예부흥, 종교개혁운동, 상업혁명, 공업혁명, 프랑스대혁명 그리고 자신의 통치를 전체지구로 신속하게 확대한 강대한 민족국가가 흥기한 세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안정은 재난이 되었고 기쁜 일이 아니었다. 중국은 겉으로 보기에만이 아니라 사실상 상대적으로 정지한 것이고 낙후된 것이었다.

끊임없는 변화와 진보의 관념은 그때 서양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러나 중국인의 사상에는 여전히 적합하지 않았다.

명조 때에 중국인이 사람들의 주목을 끈 해외원정을 중지한 결정은 중국인과 유럽인의 세계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인 차이를 충분히 표명하였다. 끝.

 

 

 

4. 漫長的 (길고 긴) 봉건사회

 

전국시기(기원전 475~221년)에 중국은 봉건사회에 들어가 1840년 아편전쟁까지 길고 긴 2.300여 년간을 거쳤다.

유럽사회와 비교하면 중국 봉건사회의 흥기는 발전과정에서 극히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먼저 중국 봉건사회는 노예사회에서 태어났는데 후자가 변하여 발전해 온 것이다.

전국시기에 철기는 농업, 수공업 그리고 일상생활 중에 비교적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사회생산력으로 하여금 분명한 발전을 획득하게 하였다.

지주의 토지사유제는 노예주의 정전제를 대체하였으며 일가일호의 소농 경제가 商周시대의 집단경작을 대체하였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은 또 상업과 도시경제의 번영을 촉진하였으며 상품화폐관계는 사회생활 중에 이미 분명하게 출현하여 신흥지주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봉건정권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점차 흥기하게 하였다.

서구에서 노예사회는 흥기발전하고 또 소멸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전형적인 봉건제도는 서기 5세기 로마제국의 붕괴로부터 시작된다.

폐허 뒤에 수립된 서구 봉건사회가 노예사회로부터 계승한 것은 단지 기독교와 심하게 파괴된 도시들뿐이었으며 심지어 사람들은 도시와 농촌의 구별을 보기가 어려웠다.

생산력이 저하되고 상품유통이 드물었으며 폐쇄적인 농촌이 사회의 주요한 기층의 정치와 경제조직이 되었다.

 

그 다음에 중국 봉건사회는 분산된 몇 개의 봉건 정권으로부터 하나의 중앙집권으로 통일되는 봉건국가 과정을 겪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6개국과 주변의 소수민족 지역들을 통일하여 중국 역사상 첫 번째의 통일된 다민족 중앙집권 봉건국가를 수립했다.

진시황은 또 군현제와 법령을 제정 시행하고 통일된 화폐, 도량형, 문자 등을 실행하여 봉건적인 정치문화제도로 하여금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확립하게 하였다.

진 이후의 중국 봉건왕조는 대부분 진나라 제도를 답습하였으며 아울러 주로 중앙이 집권통치하는 국가였다.

반대로 서구를 보면 그것이 봉건사회로 들어간 상당한 기간 동안 경제의 분산성과 국내시장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정치상으로 분열, 할거하여 여러 공국과 후국이 난립하였고 통일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봉건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다.

교회의 횡행과 종교미신의 성행은 사상문화의 진보를 심각하게 저해하였다. 11세기기가 되어서야 서구에는 비로소 소형 공상업 도시가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도시 인구가 1만을 초과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마지막으로 중국 봉건사회는 매우 길고 길어서 경과한 시간이 2.300여 년에 달한다. 진 이후에 왕조가 바뀌고 중앙정권은 수차례 교체되었는데 당조에 이르러 중국 봉건사회의 최고 전성시기에 달하였다.

봉건의 정치, 경제, 문화제도는 완비되고 성숙한 것으로 더욱 보였는데 사회문화발달 정도는 역대왕조를 초과하였으며, 수도 장안은 아시아의 경제문화 교류의 중심이 되었다.

명청 양대는 중국 봉건사회의 말기에 들어가면서 봉건전제주의가 극치에 달하고 사회상품경제의 발전이 자본주의 맹아의 등장을 야기했다.

봉건주의 사회는 서구에서 흥기한 이후에 대략 6개 세기가 지나 11세기에 성숙해갔는데 그 후 약 5세기를 지나 즉 16세기에 서구 봉건사회는 분열하여 와해되었고 자본주의 사회가 뒤이어 각국에서 수립을 선포했다.

흥기부터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까지 서구 봉건사회는 대략 단지 1.100년 경과하였을 뿐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중국 봉건사회는 길고 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동일한 생산 방식이 다른 국가 혹은 지역에서 지속시간이 1배 이상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은 본래 매우 특이한 일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 간단한 비교를 통하여 사람들은 중국과 같이 이렇게 출발점이 높고 또 일찍이 통일을 실현한 봉건사회가 반대로 지속시간은 왜 길고 길었는가? 라는 질문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싶을 것이다.

중국 봉건사회의 흥망과 그 장기적으로 성행한 정치, 경제, 문화 제도와 정책을 종합하여 보면 우리는 이하 몇 개 분야로부터 중국 봉건사화가 길고 길었던 원인을 탐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중국 봉건사회 경제구조의 견인성이다. 중국 봉건사회의 기초는 지주계급 토지 사유제이며 그 경제구조는 자급자족의 소농경제이다.

봉건 생산방식하에서 지주는 토지를 나누어 농민에게 빌려주어 경작시켰으며, 자기의 조그만 토지를 보유한 자경농도 일부 있었다.

농민들은 남자는 경작하고 여자는 베를 짜서 소농업과 가정 소규모 수공업은 서로 동반하여 1개 세대가 하나의 생산단위이며 가정이 필요로 하는 생활 자료와 대부분의 생산도구를 생산했다.

봉건 통치계급 특히 비교적 개명한 군주는 항상 限田과 均田 등 조치를 취하여 겸병을 억제하고 소작농이나 자작농이 토지와 분리되는 것을 방지하는 시도를 하였다.

지주계급 토지 사유제와 자급자족의 소농경제는 장기간 동태적인 평형 추세를 유지하여 중국 봉건사회의 장기적 지속에 경제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서구에서는 봉건사회경제가 도시. 농촌의 대립태세의 존재로써 출현한 것이며 도시 상인자본은 봉건경제를 날로 더 침식 와해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도시 상품경제는 소농경제와 장기간 공존 발전하였으며 양자 간에는 첨예한 모순이 없었다.

농민은 상품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상인도 경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중농억상이라는 전통의식의 혹사 하에서 상인들은 토지를 구매하여 토지 임대료를 받는 것은 위험이 비교적 적고 수입이 비교적 안정적인 이익을 취하는 방법이 되었다.

중국 봉건사회 상인자본의 이런 흐름은 중국사회에서 새로운 생산관계의 흥기발전에는 어려움과 장애들이 반드시 가득 차 있을 것을 예시하고 있다.

 

두 번째는 토지의 자유매매제도이다. 중국 봉건지주사유제는 자유매매제도에 수반하여 흥기발전된 것이며 소농경제와 지주의 토지사유제가 의지하여 장기간 동안 존재한 온상이다.

지주계급에 대하여 말하자면 각종 합법 혹은 불법적인 수단을 통하여 토지를 대량으로 사들여 兼幷을 진행하고 토지 임대료를 앉아서 거두어 재산을 쌓을 수 있다.

일부 관료지주의 실의와 그 자손들의 사치스런 생활 등의 원인은 그들의 정치경제문화 지위의 상실을 초래하였지만 다른 일부 신흥 지주관료는 관료사회에서 득세하여 사유토지 수량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청대 초기에 이르러 농업생산력에 발전된 바가 있고 토지수익에 제고된 바가 있게 되자 관료지주계급으로 하여금 토지를 구매하는 것에 더욱 열중하도록 촉진시켰다.

수많은 자경농과 소작농은 자주 토지를 상실하고 착취를 당하였기 때문에 파산을 초래하였으나 농업에 힘써 치부하고 또 상업을 겸하여 지주가 된 일부 소농도 있었으며 일부 농가 자제도 과거시험에서 합격하여 관료계층에 몸을 담고 대량의 토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서구에서 봉건영주는 분봉제도와 비호제도를 통하여 토지를 점유했으며 그들은 통치봉건특권에 의지하고 각종 형식을 사용하여 도시에서 화폐권력을 장악한 상인과 고리대금업자를 착취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토지 자유매매제도가 성행했기 때문에 지주, 상인, 고리대금업자가 공동으로 토지권과 화폐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토지권과 화폐권의 대립이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봉건사회 정권과 지주의 토지사유제는 도시와 농촌에서 모두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기초와 통치역량이 있었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흥기발전의 쉽지 않음과 중국 민주혁명의 문제점의 소재를 다시 예시했다.

 

세 번째는 봉건생산관계의 지역성 확장이다. 중국 봉건사회의 흥기 발전과 봉건생산방식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취득한 것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이내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전제를 삼은 것인데, 말하자면 어떤 지역과 어떤 시기에 우세를 점유했다는 것이다.

진한시기에 통치지위를 취득한 봉건생산관계는 기본적으로 아직 중원지역에 한정되었다.

전란 등의 원인으로 인해 일부 봉건지주와 농민은 강남으로 이전하여 봉건생산관계로 하여금 중원지역으로부터 강남지역으로 확대시켰다.

북방을 통치하던 소수민족은 봉건생산관계로 하여금 중원지역에서 활력을 회복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또 봉건생산관계로 하여금 북쪽으로 확대시켰다.

이외에 중국 역대 허다한 봉건정권은 일찍이 여러 차례 조치를 취하여 일부 경제가 낙후된 변경지방으로 하여금 점차 봉건화하게 하였다.

이들은 대통일 형식으로 출현한 중국 봉건왕조와 국토의 넓이와 관계가 있으며 또 중국 사회경제발전의 극단적인 불균형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네 번째는 중국 봉건 의식형태의 안정성이다. 중국 봉건 의식형태의 핵심은 三綱인데 즉, ‘군주는 신하의 기본이고 아버지는 자식의 기본이며 남편은 부인의 기본이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봉건 의식형태의 지배하에서 중앙집권의 독재제도는 불변의 진리로 보였다.

농민봉기가 구 왕조를 전복한다고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새로운 봉건 통치 질서를 수립하고 전통의 봉건 의식형태를 다시 세웠다.

족권제도는 황권제도의 보충으로 삼아졌으며 봉건 국가정권과 더 많이 결합하여 봉건윤리를 선양하고 봉건제도를 보호하려 혈연친속관계로써 계급관계를 덮었다.

‘군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 종교문화, 일상생활 심지어 유학에 침투함에 따라서 신권으로 하여금 군권, 족권, 부권과 비견하게 서서 사람들의 사상을 장기간 속박하였다.

‘삼강’으로써 핵심을 삼은 중국 봉건 의식형태는 중국 봉건사회에서 오래 성하고 쇠하지 않아 보통을 뛰어 넘은 안정성을 나타냈다.

역사유물주의는 우리에게 계급사회에서 통치계급의 사상은 바로 통치지위를 차지한 사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 봉건사회가 길고 길었던 원인은 봉건 의식형태가 일으킨 작용이 의심할 바 없이 거대했기 때문이다.

 

 

5. 18세기 중국의 세계지위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러시아, 중국 미국은 잇달아 변경을 경영하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영토가 가장 넓은 국가가 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청 왕조가 통치하는 영토는 1.200만 평방키로미터에 달하여 단지 차르 러시아 다음이 되었다.

러시아의 무력 확장과 미국의 ‘서진운동’과는 달리 청 정부는 원명 양대의 통치영토를 기초로 삼아 중앙정부의 변경지역에서의 통치를 강화 확립하고 그로부터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했으며 중국 근대 판도의 형성에 기초를 닦았다.

 

민족지구의 관할

원명 양대에 유목민족과 한족을 주체로 삼은 농업민족은 장기간 긴장상태에 처해 있었으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청 왕조는 중원의 주인이 된 이후에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준가르부 등을 평정한 대규모의 전쟁을 통하여 분열세력을 타격하고 동시에 각종 정치방식을 통하여 중앙정부의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관할을 강화하였다.

청 정부는 몽골지구에 대하여 맹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청 정부가 임명한 기장이 황제의 의지를 집행하였으며 이번원(관청의 명칭)의 관할을 복종시켰다.

주 티베트 대신과 金甁추첨제도 등을 통하여 중앙정부의 티베트와 청해 등 지역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다.

서남변경지역에서는 청 정부는 ‘改土歸流’정책을 채택하여 현지의 土司제도를 점진적이고 순차적으로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관원에게 직접 위임한 관할 범위를 증강하였다.

러시아는 피터1세의 개혁을 거쳐 국세가 강성해져서 부단히 대외로 무력 확장하였으며 예카테리나 통치시대에 이르러 그 영토는 1.700만 평방킬로에 이르렀다.

미국은 독립한 후 영토도 신속하게 확장되었다.

그것에는 현재 937만 평방킬로의 영토가 있는데(원래의 13개 주를 제외하고) ‘구매’를 통해서 획득한 상당부분이 있다.

1803년 프랑스 수중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지역의 214만 평방킬로를 구매하는데 단지 2,700만 불을 썼다. 1846년 전쟁을 통하여 멕시코의 110만 평방킬로를 탈취한 후에 또 1,000만 불로 78만 평방킬로의 토지를 ‘구매’하였으며,1876년에는 또 720만 불의 가격을 제시하여 러시아로부터 152만 평방킬로에 가까운 알래스카를 구매하였다.

 

유럽 공업혁명이 개시된 이후에 세계인구 증가 속도는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중국인구의 증가속도는 세계 각국의 증가속도보다 훨씬 높았는데 총인구수는 3억 이상에 달하여 세계 앞 열을 차지하였다.

1700~1800년에 영국 인구는 310만에서 1,590만으로 증가하였으며, 프랑스는 80만에서 2,690만으로 증가하였고, 연 증가율은 각기 5.4%와 3%였는데 같은 기간 중국의 인구증가율은 9%에 달했다.

18세기 말 러시아 인구도 4천만에 달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중국 총인구수의 1/8을 점할 뿐이었다.

18세기와 관계있는 세계인구 숫자는 현재 여전히 추산 중이다.

어떤 사람은 1750년부터 1800년 까지 세계 인구는 대략 7.3억으로부터 9.2억으로 증가하여 1.9억이 많아졌는데 중국의 비교적 믿을 만한 인구 통계는 같은 기간 중국의 인구는 1.6억 많아져서 만약 추산에 근거하면 세계 나머지 지역은 단지 0.3억 증가했을 뿐이라고 표명했다.

18세기 말 중국의 인구는 세계 총인구의 거의 1/3을 차지하였다. 1851년 중국의 인구는 4.3억 명에 달하였다.

 

국토가 요활하고 인구가 많은 동양 대국으로써 18세기의 중국은 세계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3억여 인구의 생계문제의 해결은 국내의 생산 발전과 각 지역의 경제교류가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세계 각지와 무역을 진행하는 것이 필요했다.

청 정부는 대만을 수복한 그 다음해에 해금을 개방하여 연해 인민들이 바다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허락하고 아울러 서양 상인이 지정한 광주 등의 항구에서 무역을 진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청조 초기에는 연해 일대의 명조 잔여세력과 반청세력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 정부는 일찍이‘금해령’을 내려 중국의 대외무역으로 하여금 심각한 영향을 받게 하였다.

대만의 정씨 정권이 항복한 이후에 1686년 청 정부는 금해령을 폐지하고 광주, 장주, 영파, 운대산의 4곳을 지정하여 통상 항구로 삼았으며 건륭시대에 이르러 광주 1개 항구 통상으로 고쳤다.

 

18세기 중국은 동아, 동남아 무역의 중심지역이었으며 서양국가에 대한 무역은 장기간 출초지위에 처해 있었다.

중국의 생사, 차, 자기는 세계 각지로 잘 팔려 나갔다.

어떤 사람은 19세기 20년대라고 하더라도 중국의 GNP는 여전히 세계총량의 1/4이상을 점하여 세계 제1위였다고 평가했다.

청대는 명대 제도를 계승하여 월남, 조선, 미얀마 등 아시아 국가의 대중무역은 조공의 형식을 채택하였다.

조공 국가는 규정에 따라 청조에 공물을 제공하였으며, 청조 황제는 상당한 가치의 답례를 제공하고 아울러 시장을 설치하여 조공사절로 하여금 교역을 진행하게 하였으며, 조공사절을 수행하여 함께 온 상인은 지정된 변경 항구에서 교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 국가가 조공을 허락 받은 횟수는 많으면 1년에 한 차례, 적으면 3년 내지 5년에 한 차례이다.

중국은 이런 조공무역체계의 중심에 처해 있었다. 조공무역체계 이외에 동남 연해의 상인들은 또 동남아 국가에 가서 상업에 종사했다.

그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이들 국가에 정착하였으며 또 조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서방국가의 상인은 중국의 생사, 차, 자기 등 대량의 상품을 유럽으로 운반하였는데 상반되게 유럽의 생산품은 중국인의 소비습관과 수준에 부합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유럽국가 무역에 대한 장기 출초가 형성되었다.

 

신항로가 열린 이후에 서양의 선교사들은 부단히 동쪽으로 왔는데, 그들은 서양에 중국문화를 소개하고 전파하였으며, 17세기 말과 18세기에 이르러 유럽에는 중국 문화 붐이 일어났다.

중국의 과거시험을 통하여 관료를 선발하는 방식은 서양 각국의 높은 중시를 일으켰으며, 서양 근대 문관제도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볼테르, 라이프니츠, 몽테스키외, 디드로 등 유럽의 저명한 계몽 사상가들은 모두 일찍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 고전경제학 중농학파의 시조인 케네는 중국 중농사상의 계발을 직접 받았다.

 

유럽각국에는 귀족 세습제도가 보편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공개시험을 통하여 우수한 자를 선택하고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은 유럽의 식견 있는 사람들의 높은 칭찬을 받았다.

중국의 관리 선발제도를 개선하는 기초위에서 구미 근대의 문관제도가 점차 형성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문관제도는 구미국가에서 널리 수립되기 시작했다.

볼테르는 중국의 연대학과 역사 기년법을 이용하여 <성경>중의 창세설을 반박하였다.

그는 원대 잡극 ‘조씨 고아’의 고사를<중국 고아>연극으로 개작하여 파리에서 상연하여 서양 예술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케네는 심지어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가’라고 생각했다. 몽테스키외와 디드로는 중국의 고도 독재에 대하여 비판을 진행하였는데 실제로는 공격 목표를 프랑스의 전제왕권에 향한 것이었다.

 

1792년 영국은 매카트니 사절단을 파견하여 중국에 왔다.

청 정부가 영국 측이 무역을 확대하자는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않자 사절단 인원들은 귀국한 이후에 중국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적지 않은 문장과 저작을 썼으며 유럽의 중국문화 붐은 신속하게 퇴조하였다.

그러나 이 사절단은 수많은 중국의 중요한 과학기술 성과를 가지고 돌아갔는데 예를 들면 선박 방수 밀봉 격창기술, 이중활동 실린더 풀무 기술 등이다.

다윈이 그의 저작 중에서 인용한 중국 과학기술 문헌자료는 1백여 개에 달하는데 진화론의 중요한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매카트니 사절단이 중국에 온 목적은 청 정부에 통상항구를 증설하여 주산에 1개 섬을 할양하여 영국 상인들이 거주하고 상품 저장하는데 제공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 일행이 다음 해에 承德에 갔는데 청 조정의 예에 따라서 건륭제에 대하여 삼궤구고의 예를 행할 때에 문제가 발생하여 청 정부도 영국 측의 과분한 요구를 거절했다.

매카트니 사절단이 가지고 돌아간 선박 방수 밀봉 격창기술은 영국 군함에 매우 빨리 사용되어졌으며 그들이 가지고 돌아간 ‘용골수차’ 모형도 모방 제조되어 군함 아래 부분의 배수에 사용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이중활동 실린더 기술도 일정한 정도에서 유럽 기계와 동력공업의 발전을 자극했다.

 

 

6. 淸王朝由盛而衰 (번성에서 쇠락으로)

 

중국은 농업대국이며 자급자족의 소농경제가 독재 제국을 지탱하는 경제기초이고 외래 상품에 대한 수요는 매우 적었다.

이 때문에 청조 통치자는 대외무역을 발전시키는 것에 대하여 흥미가 전혀 없었으며 폐관쇄국의 정책을 시행하고 서양 상인들이 광주에서 무역을 진행하는 것을 윤허한 것을 황제의 그들에 대한 일종의 은혜로 간주하였다.

중국 상인의 해외무역과 수출입하는 상품 종류에도 청 정부는 많은 제한을 했다.

청 정부는 서양 상인이 광주 1개 항구에서만 청 정부가 지정하는 행상과 무역을 진행할 수 있고 여자 가족 등은 광주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마카오에만 있을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관원은 서양 상인과 교류하지 않고 관련 업무는 행상을 경유하여 처리했다.

청 왕조는 1793년과 1817년에 두 차례 영국 여왕이 잇달아 파견한 사절인 매카트니와 애머스트의 통상항구를 증가시키는 것 등과 관계된 요구를 거절했다.

건륭제는 영국 여왕에게 주는 편지에서 ‘천조는 물산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어서 원래 외국 오랑캐의 상품을 빌려 무역을 하지 않는다.

천조가 생산하는 차, 자기, 비단이 서양 각국과 너희 나라의 필수품이라고 하기 때문에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마카오에 양행을 개설하여 일용에 도움이 있고 남는 이득을 보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건륭제의 자만하여 잘난 줄 아는 교만한 심리를 반영하였다.

청대 전반기에 해외로 가는 상선의 선주와 선원은 모두 상선의 허가증에 기입해야했고 상선의 출항과 귀향은 모두 반드시 등록해야만 했다.

철과 철기, 초석과 유황, 양식 등은 국외로 파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 정부의 폐관쇄국 정책은 중국과 기타 국가와의 정상적인 경제교류를 가로막았으며 자신의 시야도 제한하여 세계 각국의 상황에 대하여 멍하게 무지하였다.

건륭제는 만년에 자신의 ‘十全武功’에 만족하여 다시는 더 진취를 생각하지 않았다.

건륭제는 일생 동안 준가르부를 평정하고 구르카가 트베트를 침범한 것을 격퇴하였으며 임상문의 봉기를 진압하는 등 10차례 대내외 전쟁의 승리를 취득하여 스스로 ‘10가지 완전한 무공’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는 청 왕조는 국내와 국외에 결코 적수가 없어서 베개를 높이하고 걱정 없이 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고사상의 문자옥

한족 지식인 중의 반청의식을 억누르기 위하여 청 정부는 文字獄을 일으켰다.

강희 때 장정룡이 <명사>를 편찬했는데 사람에 의해 고발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옹정 때에는 예부시랑 사사정이 강서성에서 시험을 주관할 때 ‘維民所止’라는 출제를 하였는데 사람에 의해 ’維‘와 ’止’ 두 글자의 뜻이 ‘雍正’의 머리를 베다를 가리킨다고 공격당하여 뜻밖에 참혹하게 멸문을 당하였다.

건륭 때에 예부상서 심덕잠은 흑목단을 ‘주홍을 빼앗아 정색이 아니지만 다른 종류라도 왕을 칭하였네’라고 묘사했는데 이민족이 주씨 명 왕조를 빼앗은 것을 빗댄 것이라고 말해져서 죽은 이후에도 육시를 당하였다.

정정룡은 오흥의 부유한 상인인데 거금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쓴 <명사>를 구입하고 사람에게 판각해 주기를 청했는데 책 중에 만주인에 대한 불경한 말이 많이 있었다.

청정부가 발견했을 때 장정룡은 이미 죽어서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연좌된 자가 70여 명에 달하였다.

이것이 청대 문자옥의 출발이었다.

 

사사정은 궁정 내부의 투쟁에 말려들어 옹정제에 의하여 트집을 잡혀 제거되었는데 그가 옥중에서 자살하자 아들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기타 가족들은 모두 유배당하였다.

강서사람 왕석후는 <자관>이라는 책을 썼는데 정부에서 편찬한 <강희자전>을 수정했기 때문에 목이 잘렸다.

어떤 사람은 ‘淸風은 글자도 모르면서 어찌 책을 함부로 들추는가?’라는 이런 유희적인 시구 때문에 목이 날아갔다.

심덕잠은 원래 건륭제의 총신이었는데 건륭제는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그가 판각한 시집을 보았는데 역시 부관참시하도록 명령했다.

‘문자옥’은 문자, 태도, 사상 심지어 전혀 근거가 없는 억측으로 극형을 사용하는 근거로 삼았으며 청 왕조의 고도의 문화전제주의와 엄밀한 사상통제를 나타내며 지식인의 사상자유를 심각하게 속박하였다.

유럽의 계몽사상가들이 매우 활약하던 시기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오히려 헌 서적더미에 매몰되어 고대문화 전적의 정리와 고증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창조하는 사상은 전혀 없었다.

공자진에게는 당시 지식인들의 마음을 묘사한 시가 있다. ‘자리를 피하고 문자옥 듣기를 두려워해, 책을 저술함은 모두 곡식을 얻기 위함이지.’

사람들은 문자옥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국가대사를 감히 토론하지 못하고 열심히 저술하는 것도 모두 그럭저럭 밥을 먹고 살기위한 것이었다.

강희와 건륭의 흥성한 시기의 고서적 정리의 성취는 훌륭하고, 건륭과 가경(1796~1820)학파는 고증학으로써 특출하였으나 그러나 국가경제와 국민생활, 국가 장래에 대한 개척적 성격의 사고는 결여되었다.

 

통치자의 부패

강희제와 건륭제 성세의 사회경제가 번영한 것도 관리들의 태만과 탐욕, 부패를 조장했다.

건륭제의 총신인 화신은 작당하여 사리사욕을 도모하고 권력으로 국가를 농락하고 제멋대로 뇌물을 수수했다.

가경, 도광제가 총신 조진용을 믿은 것은 강희, 옹정, 건륭제가 그렇게 정치에 부지런한 것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윗사람이 하면 아랫사람이 따라서 한다고 각급 관원의 부패는 풍조가 되었고 무력준비도 갈수록 더 문란해졌다.

화신은 건륭제의 비위를 맞추는데 능하였기 때문에 건륭제의 중용을 얻었으며 관직이 대학사, 군기대신에 이르렀고 이부, 형부, 이번원, 호부삼고 등 많은 중요한 관서를 관리하여 한때는 조정 상하가 화신에게 뇌물을 쓰지 않으면 관리가 되기도 어렵고 승진하기도 어려웠으며 임명되었다고 해도 중상을 당하거나 해직되고 파면당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다.

뒤에 가경제는 화신의 가산을 수색하여 몰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목록에 기입된 가산의 총액은 2억 량보다 적지 않다고 평가되었다.

조진용은 탐욕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업적이 조금도 없는 것으로 도리어 이름을 날렸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승진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그는 ‘많이 절하고 말을 적게 하는 것 뿐’이라고 대답했다. 도광제가 상주문에 너무 많아서 다 보지 못하여 처리할 수도 없다고 불평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가 정사에 태만하다고 말할 것을 두려워하자 조진용은 그에게 상주문 격식과 자구상의 작은 잘못을 잘 찾아내어 질책하므로 황제는 눈빛이 예리하고 견해가 섬세하여 큰 것은 물론 그 어떤 작은 것이라도 절대 누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게 하였다.

 

이리하여 대신들은 사소한 것에도 신중해야만 했고 한계를 조금도 넘을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여 조정 상하에 기만하고 느슨한 풍조가 형성되었다.

어떤 이는 시를 써서 풍자하여 말하였다. “팔방이 무사하면 풍년이고, 국운이 융성하고, 관운도 형통한다. 모든 사람이 칭송하고 화합해야 한다고 말하니 좋아도 미봉이요, 나빠도 미봉이다. 재난 없음이 삼공에 이르니 아내는 영봉을 받고, 자식은 낭중을 받는다. 아름다운 명성이 사후에도 무궁하니 시호가 문충이 아니면 문공이다.”

청 정부는 매년 4~5백만량 은자를 지출하여 황하를 관리했는데 하천공사 관원들의 부패는 공개적인 비밀이었다. 더욱 열악했던 것은 일부 하천관리 관원이 추가예산을 얻기 위해 또 백성들의 사활을 돌보지 않고 고의로 하천 제방의 붕괴를 제조한 것이다.

팔기병과 녹영병은 평소에 거의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 한 번은 건륭제가 항주 병영에 시찰하러 가서 사병이 활을 쏘았는데 빗나가고 기마병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할 만한 전투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첨예한 사회모순

건륭시기에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사람은 많고 땅은 적은 모순으로 하여금 날로 더 돌출되게 하였으며 지주의 토지겸병도 날로 더 가중되었다.

땅이 없고 땅이 적은 농민은 자주 궁지에 몰려 위험에 빠져들고 또는 도적으로 전락하거나 또는 무장하여 반항했다.

1796년 사천성, 호북성, 섬서성 등에서 규모가 매우 큰 농민봉기가 폭발하여 10년에 달하는 오랫동안 지속하였는데 청 왕조가 흥성으로부터 쇠락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741년부터 1840년까지 전국의 인구는 1.4억에서 4.1억으로 증가하였는데 동기간 중 경지면적 증가는 비교적 완만하여 개인평균 경지면적도 대폭으로 하강했다.

18세기 말 개인평균 경지는 약 3畝였고 아편전쟁 폭발직전에는 단지 2.25무 정도이었다.

대량의 과잉인구에 대하여 건륭제는 근심이 많았는데 그는 일찍이 (그가 쓴)시에서 스스로 물었다. “만약 농민들에게 가능한 한 농업에 힘쓰라고 말해도 어떻게 경작할 밭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사천, 호북, 섬서 농민 대봉기에 참가한 것은 그곳에 토지를 개간하러 간 농민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들은 지방관리가 사교를 수사하는 것을 빙자하여 트집 잡고 수탈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청 정부는 대군을 동원하여 국고의 축적을 거의 모두 소모하고서야 비로소 봉기를 진압했다.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는 영국 상인들이 중국에 아편을 대규모로 밀수할 것을 장려했다.

아편밀수 규모의 확대는 중국 백은의 대량 유출을 초래했고 국가재정경제는 심각한 파괴를 받았으며 인민의 부담은 가중되고 사회모순은 더욱 날카로워져서 더욱 큰 농민봉기 폭풍이 준비되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 폭발 전에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수량은 이미 3만9천 상자에 달하였다.

아편밀수로 말미암아 중국이 매년 유출한 백은은 수백만 량에 달하였으며 중국 국내 은 가격의 상승을 야기시켜 농민이 세금을 납부하는 부담이 무형 중에 크게 가중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운동이 마침내 폭발했다. 끝.

 

7. 참고문헌: 한창수. 중국현대사. 2012.1. 25. 한국방송대학교 출판부. 

 

(중국어 번역은 기본적으로 직역이므로 문맥상 생소한 표현이 다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