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말기에 ‘고전’의 가치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잡지『문장』파 예술가들이 추구한 상고주의와 전통적 민족주의에 대하여
Ⅰ. 들어가며
1930년대 말은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이 생존의 방향마저도 제대로 파락하지 못하고 허둥대던 시기였다.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더욱더 물자와 인적자원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으며 조선으로부터 많은 물자와 인력를 징발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당시 문인들이 조선의 실정이 이렇게 열악하고 참담한 실정에서도『문장』과 『인문평론』 등의 잡지의 간행에 힘썼다는 것은 조선인의 주체적인 인식측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1939년 2월에 창간된 『문장』에서 이태준과 이병기 그리고 정지용이 각각 소설과 시조, 시의 추천을 담당하는 등 사실상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최재서가 주재한 『인문평론』이 친서구적인 지향을 보였다면,『문장』은 친한국적, 친동양적인 성향을 보였다.
Ⅱ. 잡지『문장』의 전통주의와 전통적 민족주의
1. 고전부흥론의 확산.
1930년대 고전부흥론은 조선일보의 저널리즘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일보는 1935년 1월 학예면 특집에서 “조선고전문학의 검토”와 ,“조선문학상의 복고사상 검토”를 통해 고전문학 탐구와 계승이라는 테마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부흥론의 실체는 자칫 1920년대 최남선 등의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복고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복고주의에 대한 경계를 하면서 고전부흥론에 힘을 실어준 논객이 바로 김태준과 이원조였다.
물론 경계의 목소리도 있었다. 임화는 카프 해체를 선후한 시기에 고전부흥론의 출현을 가장 노골적인 현실도피의 선동으로 파악하고 반동적 현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이병기는 우리는 우리자신의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고 되묻고 있으며, 김태준은 중국을 예로 들며 그들은 역사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 민족해방운동에 까지 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적’이라 해서 구박할 아무 이유도 없으며, 그런 편견이 가져온 것은 우리역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밖에 없고, 단 한권의 조선역사서도 갖지 못한 참담한 학문적 후진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이원조는 새로운 이념의 필요성과 과거 유산 자체에 대한 애정에서 고전부흥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유교적 교양이념의 공과를 평가하면서 유교를 비판하면서도, 유교적 교양에는 풍류운사가 포함되어있어서 지성의 취미화라는 현대적 교양의 개념과 유사한 특면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영정조시대의 실학이 조선에 있어서 르네상스에 해당되는 지성사의 대전환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면서 완당 김정희가 두드러진 교양인의 풍모를 드러냈다고 언급했다.
2. 문장파의 상고주의
잡지 『문장』은 독특한 편집상의 특성과 미학적 취향 그리고 정신적인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윤식은 그것을 상고주의로 파악하고 그 문학사적 위치를 고전부흥운동의 맥락 속에 두었으며 선비다운 맛과 고전에의 후퇴라고 정리하였다. 그에 비해 김용직은 전통지향 또는 전통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최승호는 선비문화에의 지향과 문인화 정신의 추구로 해석하였다.
우선 문장은 장정에 상당한 배려를 하였다. 장정의 책임자였던 길진섭은 우리의 문학이라면 우리의 장정, 우리의 표지가 창조되어야 하며, 거기에는 우리의 색감과 우리의 정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상고주의와 전통주의의 색채를 표명했던 『문장』의 편집진은 제자부터 완당 김정희의 필체를 사용하여 미학적 특색과 고풍을 되살렸고, 표지화의 대다수를 그린 김용준을 통해 민족적 색감을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잡지『문장』의 편집진들이 추구한 지향점은 광포한 군국주의와 포악한 민족정신의 말살정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색에 맞선 ‘전통주의적 정신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문장』이 전통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전의 발굴과 복원작업'이었다. 『문장』은 순수문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전과 학술분야에 상당한 지면을 배정하였다. 창간호부터 이병기 주해로 <한중록>을 연재하고, 이어 도강록(이윤재 역주). 고시조선(이병기 편), 서대주전, 토별가(이병기 해설). 고가사 이편(이병기 주해). 요로원야화기(이병기 주해)등 많은 양의 고전문학작품을 실은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그것은 『문장』편집진들이 얼마나 고전문화 유산 발굴과 민족적인 특성 부각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문장』은 국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문학(민속학 포함)과 국어학 그리고 고미술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대대적으로 실었다. 창간호부터 이희승의 조선문학연구초. 양주동의 근고동서기문선. 김용준의 이조시대의 인물화, 신윤복과 김홍도를 비롯 조선어학회의 외래어표기법. 조윤제의 조선소설사 개요. 정인승의 고본훈민정음의 연구, 최현배의 한글의 비교연구 등을 게재하였다. 이렇듯 『문장』은『인문평론』이 서구 문예이론을 도입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에 비해, 우리의 국학을 수용하고 고전적이고 전통지향의 편집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한편 정지용은 이러한 전통지향적 성향의『문장』지를 통해 전통계승론에 대해 비평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것은 상고주의와 전통지향의 성향을 보여 온 『문장』지의 편집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취해야할 태도였다. 그는 시인은 꾀꼬리처럼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발성으로 노래를 불러야 진부하지 않고 자연의 이법에도 충실한 것이라고 하면서 우수한 전통이야말로 비약의 발 디딘 곳이라고 역설하였다.
3.근대 시문학에서의 향토적 정조와 전통주의
『문장』이 1930년대 말에 내걸었던 전통주의 내지는 상고주의는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첫째는 일제의 군국주의에 굴복하는 예술적 양상과 문학적 태도가 아닌가하는 비판이었다. 특히 좌파계열의 예술가들은 『문장』파의 전통몰입을 ‘현실도피의 잠꼬대’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둘째, 근대시기에 현대적 문학을 지향했던 모더니스트들이 왜 다시 중세적 사고로 돌아가려고 하는가하는 비판이었다. 이태준이나 정지용, 김용준 등이 왜 갑자기 방향전환을 한 것일까가 모든 문화계인사들이 궁금증을 가졌다. 셋째, 『문장』파가 추구했던 향토성에 바탕한 전통성이라는 의고적 태도가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시국미술의 주제’와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향토성을 내세운 시인들의 시작태도에서 의미있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일제치하의 살벌한 현실에서 어머니 품 같은 둥지의식을 형상하고 있으며, 공동체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정체성 확보를 시도하고 있으며, 우리의 산하 등 자연의 포근함과 인간의 추악함을 대비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일제의 만행을 힐난하고 있다. 또한 향토성의 토대인 흙과 물 등 자연의 순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우리민족의 순결의식과 순진무구함을 내세우고 있으며, 군국주의 물결이 휩쓰는 1930년대 중엽부터 이제는 사라진 따스함과 포근함을 세밀하게 비춤으로써 현실을 직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마디로 향토성은 토속성과 전통성을 부각시키는데서 멈추지 않고 모순된 사회 현실에 대한 통찰과 미래 대안을 위한 열정의 삭힘을 강조한다고 했다.
4.잡지『문장』의 편집진
『문장』에는 주체적인 편집인이 드러나지 않는다.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상 편집의 실무는 정인택. 조풍연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조풍연의 회고담에 의하면 당시 편집기자인 조풍연이 판매를 빼고는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하며, 당시 이태준은 이화여전의 강의와 자기 작품 쓰는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문장』은 각 분야를 나누는 몇 사람이 편집을 주도 했다고 한다. 즉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 시조와 고전 발굴소개는 이병기로 영역이 분명하게 나뉘어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네 명은 각자가 개성이 매우 강한 면모를 지녔다.
이러한 문장파의 ‘개성추구’는 당시 예술가들이 1930년대 말의 몰개성으로 내선일체의 ‘전체주의’에 함몰되고 마는 현실과 맞서 내적인 충일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 학계에서 ‘문장파’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세 사람에 김용준을 포함시키면 문장파는 구색을 갖추게 된다. 김용준은 길진섭과 더불어 잡지 문장의 장정과 표지화를 주로 담담한 인물이다.
이병기가 일제에 맞서 우리글과 말을 고집하고 고전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게재한 것은 『문장』의 토대에 민족주의담론과 전통성의 본질이 자리하고 있음을 세상에 각인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여기에 정지용이 자신의 한적시(산수시)를『문장』을 통해서만 발표함으로써 잡지의 품위와 기품을 배어나가게 하는 데에도 큰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다.
김용준은 산수, 화훼. 소과, 기명 등을 소재로 하여 문인화 양식의 전통적인 민족문화유산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장정을 꾸며 “전통주의적 민족주의”를 표현했다. 김용준은 특히 조선의 정서, 조선 향토색의 본질에 대해 ‘고담한 맛’과 ‘한아한 맛’을 제시 했다. 또 김용준은 應物象形의 畵道論을 펼쳤다. 당시에 응물상형 없이 기운생동만 강조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개성이 몰각하고 조선회화가 쇠퇴되었다고 파악한 때문이었다.
5.『문장』파는 왜 상고주의에 탐닉했나?
『문장』은 당시 1920~30년대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을 벗어나서 전통지향적인 민족주의의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문장』의 이러한 특성은 장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다. 하나는 제호의 글씨체와 다른 하나는 김용준에 의해 그려진 표지화에서 그 분위기가 드러난다.
『문장』파가 고전을 탐구한 이유에 대해 전위 예술가 조우식이 『문장』에 쓴 고전과 가치에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서양화가들은 구주의 정신을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앞으로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전통이 남긴 아름다운 정신이 있다는 말이다.”
또 이태준은 고완품과 생활에서 “고전이라거나 전통이란 것이 오직 보관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주검이요 무덤의 대명사일 것이다. 우리가 돈과 시간을 드려 자기의 서재를 묘지화 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6. 『문장』의 지향점과 문화사적 위상
1941년부터 일제 암흑기의 문단이라고 팔봉 김기진은 증언하였다. 일제에 의해 조선이 암흑기로 접어들기까지 최후에 남아서 민족적 정서를 지킨 잡지가 『문장』이었다는 점에서 『문장』의 문화사적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민족지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마저 폐간 당한 현실에서 『문장』의 편집진은 총독부로부터 일본문으로 된 글만을 게재할 것을 강요당하면서까지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 버티다가 스스로 폐간을 자초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조풍연은 ‘일본문이 실리는 것은 된다. 그건 문학잡지를 낸 원뜻이 완전히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인문평론』은 홀로 남아서 총독부가 하라는 대로 일본문을 싣고 나아갔는데 반해 『문장』이 스스로 죽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문장』폐간의 속사정에 대해 그는 말하고 있다.
Ⅲ. 맺으며
이상으로 잡지『문장』파 예술가들이 추구한 상고주의와 전통적 민족주의에 대해 그 시대적 흐름과 역사적 의의, 그리고 편집진과 그 지향점, 그리고 상고주의와 전통적 민족주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문장』지가 전통주의를 모색하고 상고주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편집진들의 면면을 봐서도 그렇고, 잡지의 장정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당시의 편집인으로 활약한 정지용의 <향수>는 향토적 서정미가 넘쳐나는 시로써, 이 시가 대중가요로 불려짐으로써 더욱더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향토미가 우리 민족의 밑바탕이며 우리의 전통적 정서인 것이기에, 우리는 그러한 선각자적 예술인과 이들의 활동 무대였던『문장』지를 가졌던 것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Ⅴ.참고문헌: 『정지용의 삶과 문학』 박태상 지음. 깊은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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