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벚꽃은

甘冥堂 2025. 4. 13. 18:00


벚꽃 시 몇 수


벚꽃이 훌훌 / 나태주​

벚꽃이 훌훌 옷을 벗고  있었다
나 오기 기다리다 지쳐서 끝내
그 눈부신 연분홍빛 웨딩드레스 벗어던지고
연초록빛 새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 벚꽃 / 안영희 ​

​온몸
꽃으로 불 밝힌
4월 들판

눈먼
그리움

누가
내 눈의 불빛을 꺼다오.



■ 벚꽃 / 송연우 ​

​봄의 고갯길에서
휘날리는 꽃잎 잡으려다가 깨뜨렸던
내 유년의 정강이 흉터 속으로
나는 독감처럼 오래된 허무를 앓는다

​예나 제나
변함없이 화사한
슬픔,
낯익어라



■  4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 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生에 사월 꽃 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황지우 ​

​펑 !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 –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內藏寺) 가는 벚꽃길 ;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벚꽃처럼 / 다서 신형식 ​

​다시 태어나면 벚꽃이 되자
짧은 생이 허탈도 하겠지만
더 화사할 어떤 이유도 없이
영원하자 구질구질 다짐할 필요도 없이
피는 듯 지는 것 한꺼번에 보여주는
벚꽃이 되자

​그대 웃음 끝나기도 전에
그대 슬픔 준비되기 전에
모든 것의 중심은 찰나라고
깔끔하게 내려앉는

​저 벚꽃처럼
살다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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