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시 몇 수

벚꽃이 훌훌 / 나태주
벚꽃이 훌훌 옷을 벗고 있었다
나 오기 기다리다 지쳐서 끝내
그 눈부신 연분홍빛 웨딩드레스 벗어던지고
연초록빛 새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 벚꽃 / 안영희
온몸
꽃으로 불 밝힌
4월 들판
눈먼
그리움
누가
내 눈의 불빛을 꺼다오.

■ 벚꽃 / 송연우
봄의 고갯길에서
휘날리는 꽃잎 잡으려다가 깨뜨렸던
내 유년의 정강이 흉터 속으로
나는 독감처럼 오래된 허무를 앓는다
예나 제나
변함없이 화사한
슬픔,
낯익어라

■ 4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 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生에 사월 꽃 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황지우
펑 !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 –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內藏寺) 가는 벚꽃길 ;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벚꽃처럼 / 다서 신형식
다시 태어나면 벚꽃이 되자
짧은 생이 허탈도 하겠지만
더 화사할 어떤 이유도 없이
영원하자 구질구질 다짐할 필요도 없이
피는 듯 지는 것 한꺼번에 보여주는
벚꽃이 되자
그대 웃음 끝나기도 전에
그대 슬픔 준비되기 전에
모든 것의 중심은 찰나라고
깔끔하게 내려앉는
저 벚꽃처럼
살다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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