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해석 당시삼백수

212. 蘇武廟 / 温庭筠

甘冥堂 2024. 7. 25. 10:49

212. 蘇武廟 / 温庭筠

소무의 사당

 

蘇武魂銷漢使前 (소무혼소한사전) 소무는 한나라 사신 앞에서 넋이 나가서

古祠髙樹兩茫然 (고사고수양망연) 옛 사당과 고목들 보고 두 번 망연자실 했네.

雲邊鴈斷胡天月 (운변안단호천월) 구름 속에 기러기 행렬 끊어진 북방의 달밤

隴上羊歸塞草烟 (농상양귀새초연) 언덕 위 양떼들은 변방 풀 안개 속으로 돌아왔네.

迴日樓臺非甲帳 (회일누대비갑장) 돌아오는 날 누대에는 갑장이 없어졌는데

去時冠劒是丁年 (거시관검시정년) 떠날 때는 관모 쓰고 검패 찬 젊은이였네.

茂陵不見封侯印 (무릉불견봉후인) 무릉엔 봉후 인뚱이 보이지 않고

空向秋波哭逝川 (공향추파곡서천) 부질없이 가을 물결을 보며 흘러가는 세월을 통곡했겠네.

 

 

蘇武(소무)서한 사람. 子卿. 한무제 天漢 원년(기원전100) 흉노를 치러가서 억류당해 항복을 핍박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北海(지금의 패가얼호)에 버려져 양을 기르기 19, 갖은 고난을 겪어도,

충성스런 마음 변하지 않았다. 漢 昭帝 때 흉노와 화친을 맺어 한나라 사신과 흉노가 교섭하여,

소무가 드디어 귀국하게 되어 장안에 이르니, 이미 始元 6(81) 봄이었다. 후에 소수민족 사무를 전담하였다.

 

蘇武魂銷漢使前이 구절은 소무가 한 소제가 파견한 한나라 사절을 만났을 때 매우 激動하였음을 말한다.

鴈斷(안단)소식불통. 한나라 사신이 흉노한테 소무에 대해 물었을 때, 흉노는 거짓으로 소무가 이미 죽었다고 했다.

후에 어떤 사람이, 漢帝가 기러기를 쏘아 기러기발에 묶여있는 소무의 친필 서신을 받았는데, 어떤 연못에 있다고 했다.

선우는 그때서야 비로소 소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甲帳:(갑장)<漢武故事>에 기재되기를, 한무제가 유리. 주옥, 보석 등으로 장막을 만들어, 갑장과 을장으로 나누어,

갑장에는 신을 모시고 을장에는 자신이 거주하였다. 이 구절은 소무가 회국할 때 한무제는 이미 죽고,

누대 궁전은 이미 당시 출국할 때의 모습이 아니다.

 

丁年(정년)장년. 한나라 제도에 남자는 20세에서 50세까지 부역을 해야 한다하여 이를 정년이라 했다.

李陵<答蘇武書>丁年奉使 魄首而歸"의 구가 있다. 이 구는 당년 출사할 때, 면류관 쓰고 검패 차던 사람이

마침내 장년에 이르렀다.

 

茂陵(무릉)한 무제의 능묘. 지금의 삼서 흥평현에 있다. 이 구는 소무는 한무제가 세상을 다스리던 때

그를 만날 수 없었으나, 封侯의 상을 받았다.

逝川(서천)<論語. 子罕> 공자께서 시냇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

이 흘러가는 물로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비유했다.

 

 

해설이 시는 시인이 소무의 사당에 참배한 후 그의 일을 상상하여 지은 회고시이다.

1구에서는 소무를, 2구에서는 사당을 묘사했는데 그 시점이 다르다.

즉 앞 구절은 흉노에서 지낸지 19년 만에 한나라 사신을 만나게 된 그 옛날의 소무를 묘사한 것이고

뒷 구절은 시인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사당을 묘사한 것이다.

3~4구는 회고로서, 소무가 흉노에서 보낸 19년을 그림 같은 경물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그간의 사연을 구구절절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두 구절은 소무를 애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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