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불교 사상의 기초 - 성불하십시오.

甘冥堂 2011. 11. 21. 07:38

 

불교 사상의 기초

 

불교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는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명의 제자에게 최초로 설법한 초전법륜경이 실려 있다. 석가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떠나는 中道를 바른 견해라고 가르쳤다. 내용으로는 三法印 또는 四聖諦이고 구체적인 수행 방법으로는 八正道가 석가 교설의 핵심이다.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로서 인생의 고통인 원인과 고통을 벗어나는 해탈의 방법을 네 가지로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1.고성제(苦聖諦)-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

2.집성제(集聖諦)-고통의 근원은 집착이다.

3.멸성제(滅聖諦)-고통의 소멸은 열반이다.

4.도성제(道聖諦)-열반에 이르는 것은 道라는 것이다.

이 사성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팔정도(八正道)는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사유(正思惟),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주의(正念), 올바른 선정(正定)을 뜻한다. 이 8가지는 도덕성(戒, 계율) 정신집중(定,삼매) 지혜(慧,반야)라는 세 단계 수행으로 요약된다.

 

삼법인에서 諸行無常은 이 세상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은 생멸 변화하므로 항상되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항상된 것으로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기 위하여 항상되지 않다. 즉 無常하다고 말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시간적 변화를 겪지 않고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있을까? 지금 나는 이 의자가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안심하고 나의 전 체중을 맡기고 편안히 앉아 있지만, 백년 천년의 시차를 두고 생각해 보면 이 의자는 천년 후에는 분명히 존재조차 없이 먼지로 변해 있을 것이다. 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나 역시 백년 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 백년 후에는 역시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연인사이의 뜨거운 사랑도 달이 기울어지듯 시간이 가면 달라지며, 우주만물은 모두 한 찰나마다 생멸 변화하는 무상의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니 이 무상한 세계에서 사는 우리는 얼마나 허전하고 불안할까?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변화하지 않을 대상을 설정하고 거기에 내 존재를 기대어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이 부모 자식이든, 연인이든, 돈이든, 종교든, 불안한 내 인생을 기탁하여 안식처를 얻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 대상에 죽도록 매달리고 집착하게 된다.(染著) 그러나 이 세상에 불변하는 항상된 존재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니 이러한 행위는 이미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얻고자 하니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는가! 그리하여 인생은 괴로움으로 떨어져 버리고, 이 괴로움은 인생의 전형적인 실존적 상황이 된다.

따라서 불교는 인생을 괴로움의 바다(苦海)로 표현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괴로움으로 八苦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태어나는 것, 늙는다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사랑하는 대상을 잃는 것, 미워하는 대상을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감각적 욕망에 시달리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 8가지 괴로움 외에도 일생 사는 동안 사람은 무수한 많은 괴로움에서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삶의 모든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실존적 상황이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불교는 인생을 불난 집(火宅)에 비유하면서 여기에서 벗어날 해탈의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불교는 그 길을 이 세계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고정된 불변의 자아가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깨달음이며 연기법(緣起法)의 인식이다.

연기법의 기본 내용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난 까닭에 저것이 일어난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는 것이다. ’내가 나‘ 라고 생각하는 고정불변하고 영원하며 무한한 가치를 지니며 우주의 대 자아와 합일하는 자아는 실제로는 나의 착각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원인-결과의 무수한 고리를 거쳐 만들어낸 지금 여기에서의 현상적인 존재일 뿐, 결코 恒常되고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수한 원인과 결과들, 즉 인연이 모여서 지금 여기의 내가 되었을 뿐, 그 인연이 흩어지면 바로 몇 가지의 물질적 원자들로 분리되어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가 바로 지금 여기의 나이다. 나를 포함하여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 역시 다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이를 空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따라서 현상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현상의 모습이 된다(色卽是空, 空卽是色)

 

나의 자아 인식이 이렇게 실제에 기반 한 것이 아니라 착각이나 잘못된 견해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자아나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이 깨달음의 세계는 생사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적막하고 조용하며(寂靜) 십이연생(十二緣生)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탈의 세계이다. “만약 만상으로부터 취(取, 집착)하는 것이 있을 경우, 더욱 사물에 대하여 맛들이고 집착하여 마음이 거기에 묶이게 되고 애욕이 자라나게 된다. 욕망이 가슴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분주히 허둥대며 뛰어다니고 세상의 名色을 추구하게 된다. 명색은 六入處에 인연하고, 육입처는 觸(접촉)에 인연하며, 촉은 受(감각작용)에 인연하고, 수는 愛(욕심)에 인연하며, 애는 取에 인연하고, 취는 有에 인연하며, 유는 生에 인연하고, 생은 老 病 死에 인연한다. 이는 근심이고 슬픔이며 고뇌이고 고통이다. 이러한 것들은 순전히 괴로움(大苦)에 취합된 것이다”

 

이러한 십이연생(十二緣生)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석가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내 놓는다.

“만상으로부터 취하는 바가 있을 때는 무상관(無常觀)을 따르고, 생멸관, 무욕관, 멸광, 염관, 등에 머물러서 마음으로 염려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식(識)은 명색에 분주하거나 명색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명색은 소멸되고, 명색이 소멸되면 육입처가 소멸되고, 육입처가 소멸되면 촉이 소멸되고, 촉이 소멸되면 수가 소멸되고, 수가 소멸되면 애가 소멸되고, 애가 소멸되면 취가 소멸되며, 취가 소멸되면 유가 소멸되고, 유가 소멸되면 생이 소멸되고, 생이 소멸되면 老病死가 모두 소멸된 것이다.”

이것이 나무를 잘라 불태워 없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내세에 어찌 不生法(부처의 열반의 경지)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나무가 불태워져 없어진 고요한 열반의 세계, 여기에 이르른 사람은 모두 깨달은 자(부처)이다. 우리는 그러한 경지를 바라며 ‘성불하십시오(부처가 되십시오)’라고 서로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중국불교:김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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