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정 호 승
잘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 갈때까지
잘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산산조각 -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꽃아, 시인아/ 정호순
꽃도 나무도 사람도
외롭지 않은 존재는 없는데,
꽃들로 피고 나무들로 서있고
사람들로 존재하는 세상이라서
가끔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기도 한 것이겠지요.
꽃과 사람이, 나무와 사람이,
그리고 꽃과 나무와
사람이 있는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이 외롭다면
외롭고 외롭지 않다하면
외롭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외로운 존재를 詩로 옮기는 시인은
시가 있어 외롭지 않으니
우리는 외로우나
외롭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바닥에 대하여 /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수선화에게 - 정호승 -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어떤 여자 / 정호순
가을날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야금야금 시를 땅 속에 묻는 여자가 있었네
내가 시를 올리고 있는 카페에
어쩌다 한 번씩 찾아와
사유의 시 한 편을 올리던 여자
우연치 않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하루 한 편씩 시를 올리는 카페에
내 대신 시를 올려 주던 여자
내가 목발을 짚고 퇴원했을 때
함민복 시인의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는
시를 마지막으로 올려놓고는
밑도 끝도 없이 병원에 입원한다는
짧은 쪽지 한 장 달랑 던지고
가을날 낙엽처럼 홀연히 사라진 여자
바람처럼 눈처럼 비처럼
시라는 이름으로
몇 번의 쪽지를 주고받아 음색도 알 수 없는 여자
자신의 블로그 프로필에
"바람도 없이 떨어지는 꽃잎 같이 없어질 글을 쓰는 여자"
라고 자괴감을 우수에 젖은 듯 써놓은 여자
지금도 카페엔 마지막 시를 올린
그날 그 시간, 그대로의 초연한 모습으로
멈춰져 있는 공간 속에 떨어진 빗물처럼
정지되어 있는 여자
언젠가 한 해가 지나가는 가을에
문득 생각이 나 탐문했었는데
지리산 어디쯤에서 요양 중이라던 여자
문자라도 보내주면 위로가 될 거라 했지만
뾰족한 말 찾지 못해 그 마저도 못했는데
낯선 곳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어느 날 아무 일 없었던 듯 푸른 영혼으로
돌아와 맑고 깨끗한 시를 쓰면 좋겠네
헐렁한 잡지를 뒤적이다가 그 여자
시를 발견하거나 후미진 골목 무심코
들어간 작은 서점에서 그 여자 이름의
시집을 해후상봉이라도 하면 좋겠네
꽃아, 시인아 /정호순
누가 피라고 했나요 지라고 했나요
저 혼자 피었다가 저 혼자 져놓고
외롭다고 왜 투정을 부리시나요
이른 봄날 산행 길 노란 불 밝히는
생강나무도 외롭고
산 속 찾아주는 이 없는 비탈길
홀로 핀 제비꽃도 외따롭고
벼랑 끝에 세를 든 소나무도 외롭답니다
이 나무 저 나무 옮겨다니며 우짖는
저 바람도 외롭긴 마찬가지
이 세상 외로운 게 당신 뿐이던가요
외롭다고 투정을 부리지 말아요
이 세상 외롭지 않는 것이
어디 나 뿐이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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