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6 3

덕수궁의 만추

서울에 사는 사람이 남산 한번 제대로 올라가 보지 못한다고 하기야 여의도 쌍둥이 빌딩에서 2년여를 근무하면서도 6.3빌딩도, 한강유람선도 타보지 못했다. 오늘 모처럼 시간을 내어 덕수궁을 관람했다. 이렇게 제대로 둘러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덕수궁은 조선 14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란을 갔다 돌아온 후 월산대군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덕수궁에 여러 전각을 세웠다.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다.정전인 중화전 기단에는 용 문양을 새겼다.많은 전각들의 사연은 모두 설명하기 어렵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된 슬픈 역사를 품은 이곳을 둘러보는 시간이 의미있었다.

海納百川

B.C3세기 진시황은 초나라 출신 이사를 객경으로 삼았다. 이사는 외부 인재에 대한 축객령(逐客令)이 떨어졌을 때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시황제에게 올려 철회시켰다. 여기에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고, 河海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는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 (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가 나온다. 비슷한 말이 중국 동진(東晉)시대 원굉이 지은 ‘삼국명신송’에 있다. "모든 물줄기는(百川) 바다를 향하고(海), 바다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納)." 많은 사람들이 좌우명으로 삼거나 표구해 집이나 사무실에 걸어두는 글귀 "해납백천(海納百川)"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마오쩌둥도 집무실에 이 문구를 걸어놓고 항시 새겼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나라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력은 별 차이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