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추성부(秋聲賦) 유감.

甘冥堂 2011. 10. 7. 10:21

어제 저녁 자정이 가까워서 집으로 돌아오며 문득 달을 쳐다보니 상현달이 배가 불룩하니 공원길을 비춘다. 서늘한 기운이 들어 빠른 걸음을 옮긴다. 벌써 가을의 한가운데 들어 섰음을 실감한다.

 

뒷방에 앉아 환기를 위하여 문을 활짝 열었다. 책 좀 보느라 시간이 꽤 흘러 등짝이 으스스해 진다.

어? 안 되지. 이맘 때 감기들기 똑 참이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으나 으슬으슬한게 영 께름직하다.

얼른 일어나 엄지손가락의 소상 중상 노상에 란섿으로 사혈을 하였다. 감기에 대한 초기 응변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책 읽기에 아주 적당한 계절이다.

옛말에 등잔불도 없었을 시절에는 반딧불을 잡아 그것을 모아 어둠을 밝혀 공부를하고,

눈이 내리면 그 눈 빛에 의지 해 책을 읽었다 하여 螢雪之功이라는 고사도 생겨났다고 하는데.

요사이는 어디 그러한가? 전깃불을 대낮같이 밝혀 놓고도 하라는 공부는 않고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어에 謝頂(xieding)이라고 정수리의 머리털이 시들어 반쯤  빠진 상태를 말하는데,

변하는 것이 어디 머리털 뿐이겠는가? 그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추억도 빠져 나가 버린다.

 

옛 사람이 한 말, 하나도 버릴 게 없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만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쳐지나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가을은 刑官이요 때로 치면 陰의 때요, 전쟁의 象이요, 오행의 金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商聲으로 서방의 音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7월의 음률에 해당한다.

商은 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夷는 육(戮)의 뜻이다.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추성부:구양수)

 

그러나 가을 겨울은 收藏의 계절이기도 하다.

봄에 씨 뿌려 여름에 잘 가꾸어,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을 대비해 保藏하는 것이니,

이 가을을 너무 恨할 것만도 아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은 자 당연히 거둘 게 없을 터이지만,

뒤늦은 가을에 씨 뿌리는 자는 과연 무엇을 수확 할 수 있을까?

한해살이 곡식중에 이 겨울을 얼음 속에서 지내고,  그리하여 내년이나 되어서야 거둘 수 있는 것은

밀이나 보리 뿐이 없을텐데.  밀, 보리가 아닌 우리의 삶이란, 겨울에 잠이 들면 그 다음은 없는 것이니

가을의 씨 뿌림은 헛된 일이 아닌가?

 

'항상 갈망하고, 끝없이 배워라(Stay Hungry Stay Foolish)'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지난일을 회고하는 것도, 막연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도 모두 다 쓸데없는 일이다.

다만, 오늘 하루를 지금, 여기서 뜻있게 보내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