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龍鍾- 바보 온달

甘冥堂 2024. 7. 13. 10:48

바보 온달

 

고구려의 장수이자 봉성 온씨의 시조.

그리고 한국에서 '바보'의 대명사처럼 유명한 인물.

 

평원왕의 사위로, 그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전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로 영양왕 대에 까지 활약하였다.

 

전래동화로도 유명한 온달 설화의 주인공이며, 그야말로 여자 잘 만나 인생 확 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남성 버전인 온달 컴플렉스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다만 전자에 비해 잘 쓰이진 않는다.

 

2. 생애

2.1. 초기

溫達(온달) 高句麗平原王時人也(고구려평원왕시인야) 容貌龍鍾可笑(용모룡종가소) 中心則睟然(중심칙수연)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겨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家甚貧(가심빈) 常乞食以養母(상걸식이양모) 破衫弊履(파삼폐리) 往來於市井間(왕래어시정간)

時人目之爲愚溫達(시인목지위우온달)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온달이라 했다.

삼국사기온달 열전

 

온달은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 생김새가 우스울 정도로 못생겼다고 전한다.

온달은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어머니가 두 눈이 멀어 일을 하지 못하였고,

집안이 가난하여 달리 먹고 살 길이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며 먹고 살았다.

어찌나 가난했는지, 나중에 평강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산에 가 있었다.

 

그러나 온달이 추레하고 남루한 꼴로 매일 비럭질을 하고 다니다 보니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평양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 온달(愚溫達)'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보라고 불린 것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온달은 가난해서 산을 뒤져서 먹고 살았는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형편을 감안해 그냥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보라고 불렀는데, 온달은 별 말 하지 않고 웃어넘겨 더욱 바보 취급을 당했다.' 는 설.

 

어쨌거나 모습 때문에 바보로 불렸든, 행동 때문에 바보로 불렸든, 실제로 흔히 말하는 바보(=저능아)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바보가 글이나 무예를 깨우쳐 전쟁영웅이 되기는 어려웠을 테니. 그래도 평양 백성들 뿐만이 아니라 국왕까지 바보 온달의 명성을 듣고 딸에게 말했을 정도니 그야말로 전설의 바보 취급을 받았던 모양이다.

 

2.2. 평강공주와 만나다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평원왕에게는 평강공주라는 딸이 있었다. 평강공주는 어릴적부터 자주 울었는데,

그럴때마다 평원왕은 "너는 너무 잘 울어서 시끄러우니 사대부들에게는 시집 못 보내겠다.

아무래도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는걸?" 하고 우스개소리를 하며 놀렸다고 한다.

짓궂은 아버지가 어린 자식이 울 때 옆에서 놀리는 건, 왕족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딸을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아버님이 옛날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으니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고 말하였다.

평원왕은 어이가 없었으나 평강공주는 "대왕께서는 항상 '너는 필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더니

지금은 어찌 예전의 말씀을 고치십니까?"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평원왕은 크게 실망하였고, 화가 난 나머지 궁 밖으로 나가버리라고 꾸짖었다.

물론 아버지 마음에 진짜 나가라는 건 아니고 아빠 말 들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거였겠지만,

평강공주도 독이 올랐는지 금팔찌와 패물을 챙겨서 진짜로 궁을 나가버렸다.

평강공주는 그 길로 온달의 움막집을 찾아가서, 온달의 어머니에게 대뜸 절하고는 온달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때 온달은 배가 고파서 산에 올라가 느릅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평강공주가 산 위로 올라와 온달에게 청혼하였다.

온달은 처음에는 영문도 몰라 귀신에 홀렸다고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이후 그녀의 진심을 알고는 결혼한다.

 

평강공주는 궁 밖으로 나오면서 가져온 예물을 팔아서 집과 땅, 노비를 구입하여 살림살이를 갖추었고,

비루 먹은 말을 사와서는 열심히 길러 훌륭한 말로 키웠다.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진 온달은 고구려에서 매년 개최하는 사냥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2.3. 왕의 사위가 되다

당시에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산짐승의 고기로 하늘과 선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평원왕과 여러 신료들, 5(五部)의 병사들까지 모두 참석하였다.

온달은 평강공주가 사와서 잘 기른 말을 타고 대회에 나갔는데, 수많은 짐승을 사냥하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평원왕은 대회에서 우승한 온달을 불러 그 이름을 듣고는 크게 놀랐으나, 아직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중국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는데, 평원왕 역시 군사를 이끌고 이산(肄山)의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이때에도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온달이 맹렬한 기세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자 뒤따르던 군사들도 사기가 올라 후주군을 공격하니,

결국 고구려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 後周武帝出師伐遼東(후주무제출사벌료동),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왕령군역전어배산지야).

溫達爲先鋒(온달위선봉), 疾鬪斬數十餘級(질투참수십여급), 諸軍乘勝奮擊大克(제군승승분격대극).

及論功(급론공), 無不以溫達爲策一(무불이온달위책일).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삼국사기

 

그 뒤에 주() 의 무제(武帝)가 지나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 었다.

조선상고사

 

이후에 평원왕이 사람들을 모아 전공을 평가하는데, 참전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평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이 사람이 내 사위다!"라고 기뻐하였다. 평원왕은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대형(大兄) 벼슬을 내렸다. 이후로 온달은 평원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위엄과 권세가 대단해졌다고 한다.

 

2.4. 최후

이후 590, 평원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자 온달의 손위 처남인 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여 영양왕의 수락을 얻었다.

 

온달은 출전하기에 앞서 "죽령 이서(以西)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그는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아차산성 에서 전사했다.

 

그후 기록이 없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고 추정되었으나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수나라와 전쟁할 때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뺏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온달이 사망한 590년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난 598, 612-614년 사이에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회복했다는 말이 된다.

 

이후에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려 하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생과 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편안히 가시옵소서."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으며 한편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크게 애통해했다.

 

어쨌든 이로 인해 고구려의 대 신라 감정이 더 좋지 않게 되면서 이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계속 대 신라 협공을 한다.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평강공주가 유력한 귀족과 결혼하지 않고 하필이면 비천한 신분의 온달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평원왕이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술책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평강공주의 가출이 집안 문제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이런 결혼은 막장드라마나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일.

말하자면 재벌 외동딸이 노숙자와 결혼한다는 식인데, 엄격한 신분제였던 고대에 당시

저런 식의 결혼이 가능했을 법하지는 않다.

 

3.1.1. 추측1- 하급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보잘것 없던 하급 귀족이었던 온달이 후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서 부마가 되었다고 본다.

 

이 때 온달은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당서에 나타난 고구려 12관등 중 6등급의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이렇게 대단한 전공을 세우고 이 정도밖에 못받았다는 것은 온달이 하급 귀족이라는 유력한 증거라고 본다.

만약 귀족이 아니었다면 고구려 사회에서는 대형 관직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하급 귀족이나 몰락한 귀족의 자손 정도는 될 것이다.

 

이렇게 등급은 낮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평원왕의 총애를 받고 부마가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구려의 고급 귀족들이 이를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뒤에서 비꼬면서

바보 온달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당시 평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결탁했는데,

이들은 기존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하급 귀족들 출신들일 수밖에 없었고,

온달도 그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단순히 출신이 미천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관직을 받고 부마가 되었을 온달이

기존 세력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을 것이다.

 

3.1.2. 추측2 - 기존 북방귀족과 대립한 평양성계/남방계 귀족 세력

온달은 평민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다. 위에서는 아마도 하급귀족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그럴 가능성도 낮다.

 

온달의 가계로 한 10대조 쯤 올라가면 평민이거나 귀족이라도 한미한 가문일 확률도 있지만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래

수백년이 흐른 온달대에서는 이미 온달은 평양성계를 대표하는 귀족이였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달이 바보에 평민으로 설화에 나타나고 기록된건 당시 고구려의 주류는 국내성파 귀족이 즉

북방귀족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왕족을 위시한 남방계, 이른바 평양성계 귀족은 중원과 북방기마민족과 끊임없이 힘을 겨루며 존재감을 과시하던 북방계에 비해서는 좀 모자란 바가 있었다.

 

고구려가 애초에 제국으로 성장할수 있었던 이유도 상류층의 세계는 실력본위의 세계였기 때문이며

고구려는 8대성이 국가 전반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한 백제나 골품제로 얽매여있던 신라와 달리

평민이나 노예라 할지라도 국가에 공훈을 세운다면 상류층으로의 진출이 가능했고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강등당하는 세계였다.

 

천도는 왕이 왕권이 강할때 지배층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좋은 수단으로 이용할수 있는 수단이였다.

고구려는 천도를 두번 했는데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국내성에서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졸본이야 그냥 산골마을로

사실 고구려의 위상에 어울리는 땅이 아니였고 고구려의 입지가 커짐에 따라 수도를 옮기는건 현명한 선택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 졸본세력은 자신의 세력을 모두 이끌고 남하해서 백제를 세운다.

 

그에 반해 두번째 천도에서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는데 평양으로의 천도에도 불구하고 국내성으로 대표되는 북방귀족은 한족과 선비족과의 싸움에도 국토를 잘 건사한 반면 남방귀족은 광개토태왕 장수태왕때 얻은 국토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려 평원왕대에서는 입지가 쪼그라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온달이라는 사람은 다시 한번 남방계 귀족의 위상과 왕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줄 인재로 평원왕에게

간택받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북방귀족들은 상당히 아니꼬왔을 것이고, 이런 반감이 온달에 대한 비하로 연결되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3.2. 온달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영양왕 1(서기 590), 온달이 영양왕에게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자 출정하면서 "계립현(鷄立峴, 현 조령 인근)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다시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떠나,

아단성(아차성)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문제인데, 서울특별시 아차산의 아차산성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이

서로 온달과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장소 중에서 서울 아차산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정약용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서울은 온달이 되찾아오겠다던 죽령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겨우 18km 북쪽에 위치한 단양군 온달산성이 맞다는 설이

대립한다.

 

아차산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고, 또한 당시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 돌로

지은 전초기지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문헌상으로도 광개토대왕 당시 아신왕을 털어버릴 때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미추홀(인천)과 아단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압박하다가 백제 아신왕이 계속 저항하려 하자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 위례성이 함락 했다는 기록이 있는걸 보면 아차산성 쪽이 유력하다.

 

또한 '계립현과 죽령 서쪽'이 단순히 그 인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로 '한강 유역 전반'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기에 참조 서울이 해당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지자체들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확실하지는 않다' 정도지만.

 

그러나 아차산성의 발굴조사성과와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의 발굴성과는 엄연히 다르다.

쉽게 아차산이라는 말이 나오니 둘다 고구려 유적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아차산성 출토 유물은 일부

백제 유물을 포함한 신라 유물 일색이었고, 아예 신라에 의해서 축조된 산성으로까지 추정되고 있다.

 

,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과 아신왕대의 기록이랑은 맞지 않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었으나

2016년에 고구려 와당이 아차산성에서 확인되면서 이것도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복잡한 온달의 격전지에 대한 쟁점은 서울대 임기환 교수의 기고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4. 기타

4.1. 관련 사적지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하는 아차산성에서는 고구려 관련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으며,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이 세워져 당시의 전투를 기리고 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온달 장군이 쌓아 올렸다는 온달산성이 있다. 사적 제264호이며 1979년 지정되었다.

 

4.2. 전설

단양군에 있는 온달동굴은 이곳에 온달과 평강공주가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같은 위치에 온달이 쉬고 갔다고 하여 휴석동이라 불리는 인근 마을에도 온달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 뒷산에 놓인 윷판바위는 온달이 군사들과 윷놀이를 했다는 곳이다.

온달이 바위에 손으로 직접 말판을 그렸다는 것이다.

충주 월악산에 가면 지름 1m의 돌이 있는데, 온달이 그 돌로 공기놀이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단양군 향산리에 면위실이 있다. 면위실은 면위곡이라고도 하며 온달이 이곳에서 위험을 면하였다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단양군 장발리에 있는 선돌에도 출처를 알수없는(?) 민간전설이 내려온다. 온달 누이동생에 대한 전설이다.

 

충주 미륵리에는 마을 중심부를 말무덤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온달장군이 적병과 싸우다가 그의 말이 창에 맞아 죽어

그 말을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차산에는 온달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거나 또는 온달이 물을 먹어서 온달샘으로 불리는 민간전설이 채록된

약수터가 있다.

 

4.3. 그 외에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쓰인다.

, 잘난 여자가 자신을 빛내줄 거라 믿는 남자들을 빗대어 바보 온달 컴플렉스라 하는 것.

 

충북 단양군의 온달산성과 석회동굴에 이름을 붙인 온달동굴에서 매년 10월초에 온달문화축제를 하고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봉성 온씨를 위한 사현사가 있다.

 

고당 전쟁에 참여한 고구려의 장수 온사문이나 신라인인 온군해 등이 같은 온씨라는 점에서 온달과 혈연관계라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있으나, 당대의 관련기록은 없고 사실여부는 불명이다.

 

무덤의 위치와 관련해 한때 단양군에 있는 방단적석유구의 '태장이묘'가 온달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발굴 조사결과 유품이나 매장과 관련된 시설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위치와 벽화를 보고 추정하여 평양 진파리4호 고분을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무덤으로 주장한다.

중국 어디엔가 있다고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학계에서는 그야말로 뜬구름을 잡고 있는 모양.

 

온달의 회한 서린 아단성

서울 아차산성일까 단양군 온달산성일까?

 

단양군 영춘면에는 세칭 온달산성이라 불리는 산성이 있다. 고구려 장군 온달의 비극적 최후를 담은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요즘에는 산성 아래에 영화촬영 세트장 등 관광지로 개발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양강왕(陽岡王·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溫達)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통분하게 생각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다 하지 말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걸음에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했다.

 

온달이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령(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아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를 장사 지내려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가 이미 결판이 났으니, 아아! 편히 돌아가시라" 하니 그제야 관이 들렸다.

 

유명한 '삼국사기' 온달전의 마지막 대목이다.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 즉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한 후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계립령은 오늘날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옛길인 하늘재이며, 죽령은 단양과 풍기를 잇는 오늘날의 죽령이다.

이 일대는 삼국 간에 쟁패가 치열하였던 전략적 요충지다.

 

그런데 정작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아단성=아차산성' 설은 이후 신라와 고구려가 주로 충돌한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백제본기에도 아차성(阿且城)이 등장하는데 책계왕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사성(蛇城)과 함께 쌓았다고 한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할 때, 도성을 탈출하던 개로왕이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곳도 바로 아차성이었다.

이렇게 보면 아차성이 한강 하류의 요충지로서 오늘날의 아차산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차성(阿且城)과 아단성(阿旦城)은 글자가 다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름에 ''이 있어, ''로 피휘했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을 피휘할 때는 그 뜻을 따라

''로 표기하기도 한다.

 

온달산성 : 영월군 영춘면 소재. 지금 남아있는 온달산성은 신라가 쌓은 산성이니,

결국 온달은 죽어서 신라 산성에 자신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생전에 못다한 회한을 푼 것인가.

 

'여지도서''乙阿旦縣(을아단현)''乙阿朝縣(을아조현)'으로 바꾸어 표기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삼국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아단성과 아차성을 혼용하기도 하고, ''''의 글자가 비슷해서

판각시에 착종이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이름상으로는 아차성과 아단성을 동일한 성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단성=온달산성설도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견해이다. 이곳의 고구려 때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이었다는 점이나, 온달의 공언한 계립령 및 죽령과 가깝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 이 지역에는 온달 관련 전승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며 유력한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한강 하류를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강 상류 영춘지역까지 신라 영토 내륙 깊숙이 공세를 취한다는 게 군사전술상에서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

 

물론 이런 모험적인 전술이 신라군의 의표를 찌르게 되어 성공할 수도 있고, 이런 기습 작전이 성공한다면 한강 상류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위협, 차단하게 되어 한강 상류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가 효과적인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매우 위험한 작전이라는 점은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평원왕의 부마인 온달에게 과연 허용되었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더구나 현재 온달산성의 위치는 고구려가 남정(南征)할 때 주요 교통로로 사용하였을 춘천에서 홍천, 원주를 지나

충주에서 문경으로 이어지는 계립령 루트 혹은 단양에서 영주로 이어지는 죽령 루트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물론 온달산성이 위치한 영춘 지역도 곶적령(串赤嶺)을 넘어 영주 비봉산성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역시 단양 적성에서 이어지는 죽령로의 본 루트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군이 영월, 영춘으로 우회하여 남진하던 도중에 영춘의 온달산성에서 온달이 전사하였다는

견해도 있지만, 아단성을 온달산성에 비정하는 선입관에서 나온 지나친 추정이 아닌가 싶다.

 

역시 당시의 정세에서 볼 때 고구려군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공격이라면 한강 하류에서 임진강을 건너

현 아차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사례가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603(고구려 영양왕 14, 신라 진평왕 25)에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신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고,

신라 진평왕이 직접 1만군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북한산성의 신라군과 호응하였기에 고구려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그래서 위 기사를 온달의 공격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고, 장군 고승(高勝)이 곧 온달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온달의 공격에 대해 정확한 시점은 나와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영양왕 초기이기 때문에, 590년 이후

603년 이전 어느 시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때 신라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북한산성이 아니라 바로 한강변의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에서 '北漢山城'명 기와가 출토되어 아차산성이 곧 신라의 북한산성임이 고고자료로도 확인되고 있다.

아차산성 위치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보루성이 산재해 있는 한강변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603년의 고구려의 공격이 아차산성이라면 그 얼마 전에 온달이 공격한 아단성도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온달의 공격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553~568년 기간에 고구려가 신라의 한강유역 영유를 묵인하고 대신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공세를 중단하는 양국 간 밀약을 깨뜨리는 새로운 전략이다.

이는 영양왕대 본격화된 고구려의 새로운 국제전략에서 나타난 것이다.

 

지금의 한강변 아차산성이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이라면, 왜 영월 영춘의 온달산성 일대에 온달과 관련된 설화가

남게 된 것일까? 이들 설화가 온달이 이 지역에서 전투를 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한 것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문헌자료를 찾아보면 영춘의 온달산성에 온달과 관련된 기사가 언급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영조 이후의 문헌부터이다. 그 이전 문헌에서는 단지 '성산고성(城山古城)'에 대한 기록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부터 성산고성에 온달전승이 더하여 기록되고 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여러 지리지 문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춘의 옛 지명이 '을아단'이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온달전승과 연계시켰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충()의 표상으로서 온달에 대한 기억을 널리 환기시키려는 뜻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42년에 발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고성의 이름마저 아예 '온달성'으로 기록하면서

전승의 결합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춘에서 온달 전승이 조선후기에 적극적으로 환기된 것처럼, 계립령인 하늘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온달 전승이 유포되어 있다. 역시 실제의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지역 전승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서울 아차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동상

 

오늘날에는 서울 아차산에서도 온달전승이 새삼스레 환기되고 있다. 특히 고구려 보루성과 연관하여 적극적으로

온달의 이미지가 여러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동상도 만들어지고 온달장군 주먹바위, 평강공주 통곡바위 등 그럴싸한 이름이 아차산 곳곳에 붙여지고 있다.

 

이렇게 온달 전승이 생명력을 갖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온달 전승에 민중들의 꿈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곳곳에서 온달 전승을 옛 유적과 연결하여 환기하는 것도 역사를 기억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사또sato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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