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일타스님 自警文

甘冥堂 2022. 4. 23. 09:05

일타스님 自警文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제 1

 

自警文(자경문).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 자기가 자기를 경계하는 글이라!

 

야운비구는 술하노라. 야운비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는 몰라요.

 

야운비구라는 사람이 신라 원효대사 밑에 야운 비구라고도 하고, 고려시대 나옹 스님 밑에 야운 비구라고도 하고

드러난 야운이 두 사람인데 두 사람 말고도 다른 야운인지도 모르고요. 생몰연대를 확실히 모르는데요.

모두 전설적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원효대사가 금강산에서 토굴 살이를 하고 기도를 하고 사는데, 옛날에는 향로라는 것이 화로 불을 담아다 놓고,

거기다 향나무를 삐져서 꽂으면 연기가 소르르 나고 그랬거든요. 화로 불 그것이 방도 따뜻해지고, 요새는 선향이지만

옛날에는 선향이 아니고, 만수향. 향나무를 삐져서 태우는 건데요. 밤만 자고 나면 어떤 놈이 와서 화로 불을 헤쳐서

불이 다 꺼져버리고, 꺼져버리고...

 

옛날에는 불씨 하나 살려내기가 힘들거든요. 성냥불도 없을 때...

어떤 놈이 밤에 와서 화로 불을 다 헤쳐 놓고 불을 껐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날마다 그래요. 불 한번 피우려면 힘들고, 힘들고...

 

하루 밤은 탁자 밑에 숨어서 지켰어요. 지키고 있는데 밤중쯤 되니까 이목구비가 아주 준수한 남자가 아이고 추워라.”

하면서 들어오더니 불을 헤치고 불을 쪼이거든요. 그래 가서는 확 잡았어요.

 

네 이놈, 네가 누구냐?”

저는 금강산에 몇 천 년을 살고 있는 영랑 선인 이라고 하는 신선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나?”

동해바다가 세 번 마르는 것을 봤습니다.” 삼겁을 살았다는 겁니다.

네가 추위를 타는 걸 보니 五衰苦(오쇠고)가 나타났구나.”

죄송합니다.”

 

천상사람이나 신선들한테 오쇠고라는 것이 있는데, 다섯 가지가 쇠퇴해진다 이 말입니다.

부자로 잘 살 때는 얼굴이 반질반질 하니 살도 찌고 근사한데, 쇠퇴해지는 오쇠고가 나타나면,

頭上華萎(두상화위). 머리가 꺼칠해지면서 머리에 쓴 화관이 시들어 진다는 겁니다.

머리에 쓴 화관이 아주 생생하니 좋았다가 시들어서 푹 풀이 죽어 버린다는 겁니다.

 

둘째는 腋下汗流(액하한류). 겨드랑이에서 땀이 자꾸 난다는 겁니다.

오쇠고가 나타나면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나고, 냄새가 나고요.

身體臭穢(신체취예).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니까 냄새가 날 수밖에요.

 

셋째는 몸이 쇠해지면서 자꾸 한기를 느낀다는 겁니다.

 

넷째는 衣服垢穢(의복구예). 암만 씻어도 몸에 자꾸 때가 생기고, 仙衣(선의)가 더러워진다는 겁니다.

선의는 하늘 옷이지요. 새 옷을 입어도 비 맞은 중처럼 금방 추접해진다는 겁니다.

 

다섯째는 不樂本座(불락본좌). 마음이 자꾸 불안초조 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쇠고입니다.

자기 수명이 다 해 가니까 다섯 가지 오쇠고가 나타나는 지금 그런 형편에 있어요.

身强力足(신강력족). 몸이 한창 장성할 때, 몸이 건강하고 좋을 때는 얼굴이 번들번들 하게 훤하고,

꽃핀 것처럼 모든 것이 좋을 뿐 아니라, 아무 옷을 턱 걸치더라도 그냥 그대로 멋이 있고,

아무 음식을 먹어도 그냥 소화도 잘 되고, 아무렇게나 자도 몸이 건강하고,

사람이 그러던 것이 늙으면 다 안 그러거든요.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 않고, 아무 것을 먹어도 소화도 잘 안 되고, 몸도 삐쩍 말라서 한기를 잘 느끼고,

노여움도 잘 타고, 슬픔도 잘 생기지요.

 

죽을 때 다 돼가면 그렇거든요. ‘늙었다고 무시 하는구나.’ 그것이 모두 오쇠고입니다.

 

백천만겁을 이 몸뚱이를 가지고 오래 살아봐도, 다 소용없는 것이라고 원효스님 법문 한 마디에 깨쳤어요.

無常心을 발해서 無上菩提心(무상보리심)을 발했어요. 이 몸뚱이가 무상한 줄 아니까 無上道心을 발했어요.

 

그래 원효대사의 제자가 되었어요. 근기가 수승 하니까 법문 한 마디 듣고도 그냥 깨치거든요.

그래서 야운 비구가 되었다는 겁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속초위에 간성입니다. 간성에 그 큰 호수 이름이 영랑호수 잖아요.

이 신선 이름이 영랑선인이거든요. 이랬다 하는 전설적인 설화가 있는데 그대로 재미가 있지요.

 

그 뒤에 고려 말에 나옹 스님의 제자 가운데 야운 비구라는, 야운 스님이라는 스님이 있었대요.

野雲覺牛(야운각우)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야운각우 스님의 글인지, 영랑선인 후신인 야운인지, 누구 글인지 확실히 모른대요.

왜 그러냐 하면 이 글 내용 자체를 봐서 원효대사 당시의 야운이라고 하면,

이 자경문 가운데 참선 얘기가 더러더러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참선법이 그렇게 퍼지지 아니 했을 때라는 겁니다.

祖師禪(조사선) 선법이 퍼지지 아니 했을 때인데, 조사선 얘기가 더러 나온 것을 보면 원효스님 당시가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러나 선법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정도는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도 하고요.

 

고려 나옹 스님 당시의 야운 스님이라고 한다면, 나옹 스님은 중국에 가서 格外禪地(격외선지)를 크게 깨달아서

임제종지를 아주 크게 깨달은 대 종사인데,

여기에서는 평범한 법문이지 선문의 옛날 큰 스님네들의 아주 투철한 격외법문 같은 것을 인용한 것도 없고요.

투철하게 깨달은 소식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옹 스님 제자라고 하기는 약간... 그 때 禪風(선풍)을 봐서는

글 자체가 약간 그 때 그 선풍에 걸맞지 않는 글이기 때문에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는데

아무 스님이었든지 상관있나요? 글이 좋으면 그냥 그대로 된 것이지요. 어쨌든 간에 야운 비구라고 하는 사람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野雲堂上(야운당상)野雲飛(야운비)하고. 야운 당 위에는 들 구름이 턱 하니 흘러가고 있고 하는 글도 있다는 겁니다.

 

나옹 스님의 호가 江月焮(강월흔)이라고 그랬는데, 강에 비친 달이라고 그랬어요.

江月焮上(강월흔상)江月白(강월백)이라. 강월흔상에 강월이 흰데, 강 달이 흰데 野雲堂上에 야운하니라.

야운 당 위에는 들 구름이 한가롭더라.

 

雲光月色(운광월색)交流處(교류처)에 구름과 달빛이 서로 떡 사귀어서 빛나는 그 곳에

一室含虛體自(일실함허체자)니라 한 방에 허공을 머금고 있는 그 자체가 스스로 편안하더라.

이런 글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운 스님이 아니겠나?

 

또 이 야운 스님은 어떤 명리에 속하지도 아니했고, 고고하고 고매하게 수행만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門庭險峻하고 意氣高閑(문정험준의기고한)이라. 문정이 아주 규칙적이고 그 뜻과 기개가 아주 높고 한가롭다

이 말입니다.

 

現念努具하야 折邪之相(현염노구절사지상). 아주 성내는 모습을 나타내서, 사악한 일을 확 꺾어 버리는

그런 모습을 갖추기도 했고,

開慈悲有하야 引導之容(개자비유인도지용). 자비심을 열어서 인도하는 얼굴을 나타내기도 했더라.

各賢大德野雲覺牛禪師(명현대덕야운각우선사). 그 이름이 크게 드러났던 대덕스님 야운 각우 선사라.

이런 글도 있다는 겁니다.

어느 야운인지는 확실치는 않아요.

 

主人公(주인공)聽我言(청아언)하라 幾人(기인)得道空門裏(득도공문리)어늘

汝何(여하) 長輪苦趣中(장륜고취중)

 

주인공아 하는 소리가, 옛날에 어떤 스님은 항상

주인공아~” 자기가 그렇게 불러요.

주인공아~” 그러면

~ ” 자기가 또 그렇게 대답을 해요.

게으름 부리지 말라.”

~ ”

자기가 소리 지르고 자기가 대답하는 그런 스님이 있었다고 그래요.

 

이 몸뚱이는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이 몸뚱이는 자동차와 같은 것이니까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주인이 있잖아요.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운전수거든요.

운전수가 진짜 주인이거든요. 마음 운전수가 주인공이고요.

이 몸뚱이는 자동차, 껍데기지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다 이 현상계의 눈에 보이는 것에 모두 집착을 하고,

탐진치 가운데 놀아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탐진치를 부리고 있는 이 현상계의 원 주인공!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자리가 주인공이라 이 말입니다.

신선도라는 것은 이 몸뚱이를 잘 고르고 다스려서 요가를 성취해서. 인도에서는 요가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신선도라고 하는데, 중국의 신선도나 인도의 요가나 다 어슷비슷한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 몸뚱이의 長生不死(장생불사)를 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장생처를 어떻게 아느냐?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뭘 가지고 산다고 하느냐하면,

호흡을 하기 때문에 산다고 한다 이 말입니다.

 

호흡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것인데요. 들이쉬는 숨은 생이고, 내쉬는 숨은 사. “生死(생사)” “생사하는데,

호흡을 하지 아니하고 이 몸뚱이를 유지할 수 있으면, 장생불사할 것 아니냐 이겁니다.

그래서 한 평생을 호흡 조절을 잘 하는 겁니다.

 

신선도에서는 호흡 조절 잘 하는 것이 신선도입니다. 인도의 요기들이 어떻게 호흡을 하느냐하면,

호흡을 딱 멈춰서 발뒤꿈치로 호흡을 해요.

 

발뒤꿈치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인도독립 운동 하다가 영국군들한테 잡혀서 목을 매달아서 교수형으로

다 죽여 버리거든요. 교수형으로 목을 매달아서 죽여 버린 것을 갖다가 묻으면, 벌떡 일어나서 달아나 버리거든요.

 

죽은 줄 알았지만 안 죽었거든요. 모가지 암만 매달아 봐도 소용없어요. 호흡 안 하니까요.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까

발뒤꿈치로 호흡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도끼로 전부 발뒤꿈치를 찍었어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발가락으로 호흡하면 되니까요.

그것이 말하자면 요기들입니다. 요기들은 갖가지 모습이 많아요. 어쨌든 간에 호흡을 완전히 완성한 사람들이

요기들입니다. 호흡 조절을 성취함으로서 장생불사를 기하는 것입니다. 오래 살기를 기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신선도입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모양이 있는 현상을 가지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신선도다 이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유한한 것입니다. 불법에서는 이 몸뚱이라는 것은 모양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인데, “주인공!” 마음자리를 깨달으면 그것이 진실한 도다.” “내 말 좀 들어봐라.”이겁니다.

 

幾人(기인)得道空門裏(득도공문리)어늘. ‘몇 사람이 공문 속에서 도를 얻었거늘.’ 그랬는데, ‘몇 사람이라는 말은

몇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역대 조사들이그 말입니다.

 

공문 속에서 도를 얻었거늘.’ 하는 말은 무슨 얘기냐 하면, 절 집안을 空門 이라고 하는데 일주문. 대문간만 있지

문이 없잖아요. 누구든지 출입할 수 있으니까요. 텅 빈 문이라고 해서 공문 이라고 하는데요. 사랑에 걸리고,

탐욕에 걸리고, 탐진치 오욕락에 걸려 있으면 有門(유문)이지 空門이 아니거든요.

 

탐진치 오욕락을 다 비워버린 문이 공문입니다. 구정물처럼 확 비워버리고 완전히 안팎으로 환히 밝게 만든 문을

공문 이라고 합니다.

 

마음 가운데 모든 84천 번뇌 망상을 다 털어버린 것을 공문 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法門(법문)”이라고도 합니다. 法門이라는 것은, 자는 물로 씻어버린 것이 이거든요.

구정물 그릇을 싹 씻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구정물 그릇을 싹 씻어서 푹 울궈서 완전히 깨끗한 그릇 만들어 놓으면 그것도 쓸 수 있잖아요.

꿀 단지 만들어도 되잖아요. 유리그릇이나 강한 도자기 그릇은, 구정물을 암만 오래 담아 놨었어도 울궈 버리면

완전히 깨끗하게 물로 씻어 버리면, 물로 씻어 버리는 것이 법 자잖아요. 물로 깨끗하게 씻어 버리는 것이 法門입니다. 법의 문입니다. 법의 문이 바로 공문입니다. 이 공문에 대한 비유 얘기가 재미있는 것이 있지요.

 

옛날에 계현법사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 계현법사라고 하는 스님이 상좌를 하나 두었는데

신찬선사라고 하는 스님이었어요.

 

그 신찬스님은 禪門(선문)에 본래 선근 종자가 깊은 스님입니다.

 

스님 밑에 있다가 참선도 안 하고 맨날 글이나 배우고 일이나 하니까 도망을 했어요.

백장회해스님 밑에 가서 참선을 해서 견성을 했어요. 깨쳤어요.

깨쳐서 몇 년 만에 누더기를 입고 돌아오니까 자기 스님이

 

네가 나를 떠나서 무슨 짓을 했느냐?”

아무 짓도 크게 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한 짓도 없으면서 장돌뱅이하고 돌아다녔나? 산에 가서 나무나 해오너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왔어요. 떡 하니 나무를 해오니까

불 떼어서 목욕물이나 데워라.” 목욕물을 데워서 목욕을 합니다.

여기 와서 내 등 밀어라.”

등을 쓱쓱 문대는데 문대다 보니 스님이 살이 쪘거든요. 등을 문대다 하는 말이,

 

好好法堂(호호법당)이여, 좋고 좋은 법당이여, 법당은 좋다만 而不佛靈(이불불령)이로다.

부처가 영험이 있는 둥 없는 둥.” 이러거든요.

이놈이 뭐라고 하나?”쳐다 보니까

부처가 영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방광은 할 줄 아네.

 

佛雖不靈(불수불령)이나 也能放光(야능방광)이로다. 부처가 영험은 없어도 방광은 할 줄 아는구나.” 이랬어요.

지금 발가벗고 목욕하는 중에 실갱이 하기도 안 되어서 이 자식이 어쩌다가 헛소리 좀 하는가?’ 싶어서

못 들은체 하고 말았어요.

 

그 뒤에 또 며칠 후에 경상을 놓고 창문 앞에서 경을 보고 있는데 창문을 한 쪽은 닫아놓고 한 쪽은 열어 놨거든요.

벌이 한 마리 들어와서 열어놓은 문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고, 열어놓은 문으로 쑥 나가면 나갈 것인데

그건 안 보이는 겁니다. 닫아 놓은 봉창문을 당당당당 당당당당 봉창을 두두리고 있거든요.

새가 들어오든지 뭐가 들어오면 열어놓은 문으로 나가려고 아니합니다.

 

어쨌든지 닫아놓은 문으로 나가려고 당당당당 거립니다.

 

신찬선사가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空門(공문)不肯出(불긍출)하고, 投窓(투창)에 야대치(也大痴)로다.

공문 = 빈문 = 열어놓은 문이라는 말입니다. 공문으로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창을 두두리고 있으니 참 어리석구나.

 

百年(백년)鑽古紙(찬고지)한들, 백 년 동안을 옛 종이를 뚫고 있은들,

何時(하시)出頭期(출두기). 어느 때에 출두할 기약이 있는가?

어느 때에 대가리가 쑥 나갈 기약이 있겠는가?

 

古紙라는 것이 창문이 고지이기도 하지만, 창문이라는 것은. 옛 종이라는 것은 경책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책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오래된 책을 古紙라고 하거든요. 백 년 동안을 책 들여다본다고 해탈할 기약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책에서 해탈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약방문 들여다본다고 병 낫느냐? 이겁니다. 약방문 암만 다 외워봐야 약 안 먹으면 소용없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기스님하고 벌 하고 싸잡아서 욕을 한 것입니다. 전 날은 발가벗었으니 실랑이를 못했지만, 오늘은 옷을 입고 경을 보는데, 전 날도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오늘도 뒤 꼭지를 치거든요.

 

, 네가 어디 다니면서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

제가 백장회해선사 밑에 가서 한 생각 쉬었습니다.”

그래?” 하더니 뛰어 나가서 대종을 꽝 꽝 울리며,

내 상좌 성불했다~~. 법문 들으러 오너라~~.” “내 상좌 성불했다~~. 법문 들으러 오너라~~.” 하고 대종을 울려 제끼니까 산중 스님네들이 대종 소리 듣고, 대중이다 모였어요. 신찬선사까지 법당에 다 모였어요.

 

모이니까 스님이 상좌한테 절을 하면서

 

제발 대중을 위해서 한 마디 법문을 해 주시오.”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 씻는 문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자 사양할 것도 없이 서슴치도 않고 법상에 척 올라가서 주장자를 텅 구르고 하는 말이,

 

靈光(영광)獨耀(독요)하야 逈脫根塵(형탈근진)하니,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척 드러나서.

신령스런 광명은 마음에 빛이 났다 이 말입니다.

 

마음의 빛이 태양의 빛과 같이 구름을 헤치고 척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나의 본원 자성자리가 번뇌 망상에 가려서

자성광명이 드러나지 못했는데, 번뇌 망상이 척 갈라지고 벗어지고 나니까 본원 자성자리가 백청일월과 같이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신령한 광명이 홀로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逈脫根塵(형탈근진)하니, 根塵. 6근과 6진이라는 말입니다. 정진이라는 말이 根塵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66. 안 이 비 설 신 의 6근 동작에 우리는 항상 끄달리고 있고, 색 성 향 미 촉 법에 언제든지 집착을 하고 있는데,

안 이 비 설 신 의 6근과 색 성 향 미 촉 법 6진 경계를 확 벗어나 버렸다 이 말입니다. 형탈근진하니.

멀리 6근과 6진을 해탈했으니. 벗어났으니.

 

眞常(체로진상)하야 不拘文字(불구문자)로다. 그 원자체가 참되고 항상된 자리. “진리라 이 말입니다.

眞常이라는 것은 진리라는 말이거든요. 참되고 항상된 자리를 턱 드러나서 불구문자로다.

그 도리는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어떤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다 이 말입니다. 언어문자로 채울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언어문자가 닿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心性(심성)無染(무염)하야 本自圓成(본자원성)이어늘. 마음성품. 마음 원바탕자리는 모든 더럽고 깨끗한 것을

다 떠나 버렸기 때문에 본래 스스로 원만성취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本自圓成이라.

 

但離妄緣(단이망연)이면 卽如如佛(즉여여불)이니라. 다만 망상반연. 번뇌 망상 이것 하나만 똑 떨어지면

곧 여여불이니라. 여여한 부처가 바로 이것이니라. 이런 법문을 했어요. 이 법문아래 저희스님도 확철대오를 했어요.

깨쳤어요. 깨치고서는 상좌한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何期受老(하기수로)하여 得聞如是(득문여시) 極勅法門乎(극칙법문호).

 

내 늙어서 죽을 때가 되어서 어찌 이와 같은 극칙법문을 들을 줄을 누가 기약 했었었느냐고 감사. 감사합니다.”하고

상좌한테 무수히 절을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心性(심성)을 깨달은 사람들의 아주 좋은 空門법문입니다.

 

그러니까 텅 열어놓은 문!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문.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것은 믿지를 않고 나가려고 생각을

하지 않거든요. 닫아 놓은데 어디 공간이 없는가 싶어서 공간을 찾느라고 당당당당 당당당당 봉창을 두두린다 이 말입니다. 空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문이거든요. 색성향미촉법 조견오온을 제대로 못해서.

五見五蘊(오견오온)照見(조견) 해버리면, 비춰보면 五蘊이라고 하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 이잖아요?

()이라는 것은 일체만유를 두고 하는 것이고, ()라는 것은 받아들인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감성하는 것이,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입니다.

 

아무 감정이 없으면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못해요.

예쁜 것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되는데, 예쁜 것을 예쁜 줄 모르면 받아들일 수가 없잖아요.

안 받아들여지잖아요.

 

여기에 굉장히 미인이 있다면 같은 또래의 여자들은 질투를 하거든요.

예쁘니까요. 그렇지만 7~ 80 할머니들은 무상심심합니다. 예쁘면 어떻고 미우면 어떠냐 해서

아무 질투도 느끼지 않고, 아무 감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보는 사람마다 감정이 각각 다르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받을 자입니다. 그래서는 취사선택을 하거든요. 그것을 가져야 되겠다. 버려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思惟(사유).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사유 하고서는 행동에 옮기거든요. 행동에 옮겨서 꺾는다든가 갖는다든가

무슨 일을 저지른다 이 말입니다. “일 저지른다.”그러지요. 행동에 옮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는 거기에 모든 분별이

생기는 겁니다. 좋고 궂은 분별이 일어나는 겁니다. 색수상행식 이거든요. 이것이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인데,

오온에서부터 시작해서 번뇌 망상이 84천 가지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오온이 탁 皆空(개공)하면. 다 공해 버리면 한 가지 집중함으로서 오온이 개공 하면.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입니다.

 

일체고액을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관을 자재하면 관자재보살 하면, 오온이 개공한 것을 조견해서.

오온이 다 공한 것을 조견해서 도일체고액. 일체고액을 벗어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삼장법사가 서천 서역국 가다가 五蘊山(오온산)을 만나서 오온산 꼭대기에 옴 마니 반메 훔하는 말뚝을 뽑으니까

오온산이 터지면서 거기에서 천년 묵은 돌 원숭이가 탁 튀어 나왔다고 그랬잖아요. 돌 원숭이가 튀어 나와서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제자 손오공이가 나타났습니다.” 五蘊皆空했으니까 五空입니다.

오온이 개공한 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오공입니다. 그래서 손오공입니다.

 

손은 번뇌 망상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짐승 중에 제일 까불이가 원숭이입니다. 이 자식은 똥구녁을 깠다가 거꾸로

재주를 넘었다가 잠시도 가만히 안 있거든요. 우리 마음자리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 마음자리가 원숭이처럼 온갖 재주 다 부리고 어쨌든지 간에...

 

다람다람 다람쥐야. 알밤 줍는 다람쥐야. 보름보름 달밤에 알밤 줍는 다람쥐야. 다람쥐보다 더 까불이가 원숭이거든요. 잠시도 가만히 안 있어요.

 

중생의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했어요. 그 원숭이가 날고뛰고 재주를 넘고, 잠시도 가만히 안 있는 것이 우리 마음자리

번뇌 망상에 비유했어요. 이것이 오온이 개공한 도리를 깨달은 것이 손오공입니다.

그것을 깨치고 보니까 색불이공이요. 공불이색이거든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또 색과 다르지 않거든요.

 

관이 자재하니까 그렇게 돼버립니다. 관이 자재해 버리니까 관자재보살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 됐더라.

색만 그런 것이 아니라 수상행식이 다 그렇거든요.

 

수상행식이 역부여시거든요. 또한 다시 그렇더라. 그래서 손오공이된 경계가 바로 空門입니다.

 

空門을 턱 하니 통과함으로서 거기에서 를 얻었어요. 라는 것이 무슨 말이냐? 인생이 가야할 길. 우주가 가야할 길. 인생과 우주의 진리의 길이 바로 다 이 말입니다. 옛날 말로 도이고, 요새말로는 진리이고 그렇습니다.

 

요새는 진리탐구를 위하여 어쩌고 그러는데 진리가 무엇인지, 철학개론에 보면 진리는 말할 수 없고, 진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진리는 뭐라고 알려질 수도 없다. 이런 소리가 있지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라 이 말입니다. 옛날 말로 도이고, 요새말로는 진리다 이 말입니다.

 

空門 속에서라야 진리를 얻지, 有門 속에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도를 얻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번뇌 망상 속에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이것입니다. 번뇌 망상이 공한 속에서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이 一心執中(일심집중)해서 화두를 세존이 어째서 꽃을 들었는가?’ ‘세존이 어째서 꽃을 들었는가?’ 하고 있다가 잠도 오지 않고 다른 망상도 없이 오직 一念으로. 일념으로 화두가 되었을 때, 어떨 때 그럴 때가 있어요.

 

어쩌다가 자꾸 애쓰고. 애쓰고 염습을 하다 보면 홀연히 한 시간이 언제 가 버렸는지 가 버릴 때가 있어요.

한 시간이 10분이나 5분 만에 한 시간이 되어버리는 그럴 때가 있어요. 저 우주공간 무중력 상태에 가면,

사람들 느낌 자체가 긴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 바로 그와 유사한 ()라고 할 수가 있어요.

 

 

출처 : yumhwasil

글쓴이 : 강정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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